추니박 드로잉에세이 《질문》 출간기념회·아티스트 토크 현장
2026년 10월 24일 토요일 오후, 파주 한주아트스페이스에 추니박 작가의 드로잉에세이 《질문》을 기다려 온 독자들이 모였다.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출판지원 프로젝트 그림에세이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이자, 작가가 스무 해 동안 그려 온 드로잉 107점에 한 줄씩 글을 붙인 책이다. 개인전 〈무한화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 한복판에서, 작가는 한 시간 가까이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꺼내 보였다.
이야기는 기다림과 그리움에서 시작해 고독과 사랑, 그리고 스물한 살 어느 밤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끝내 작가는 말을 잇지 못했고, 사회를 보던 필자도 함께 목이 메었다. 그렇게 무거운 질문을 지나온 뒤, 작가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책 첫 장에 한 자 한 자 눌러 썼다.
문을 닫아서는 안 되는 전시장
한주아트스페이스는 베이커리 카페로 이름난 곳이다. 통유리로 트여 있던 상업 공간에 가벽을 세워 전시장을 만들었고, 한쪽 창만은 일부러 열어 두었다. 그 창 너머로 산과 들판이 보이고, 창 안쪽 벽에는 추니박의 숲과 섬이 걸려 있다. 자연 안에서 자연을 그린 그림을 보는, 드문 구조의 전시장이다.
행사 시작 전부터 입구 테이블에는 《질문》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예약구매를 하고 책을 현장에서 받기로 한 독자만 30여 명이었다. 작가의 오랜 동료 화가들과 조각가, 갤러리 관계자, 철학자, 그리고 서울과 먼 지방에서 온 팬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사회는 책을 기획한 필자가, 패널은 저자 추니박 작가와 전시를 기획한 정형탁 디렉터가 맡았다.
심천역에서 시작된 기다림
첫 질문은 책의 1부 '기다림과 그리움'에서 출발했다. 충북 영동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끝 무렵,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타고 서울 작은집으로 옮겨 왔다. 어머니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떠남이었다.
"그리움이라는 게 제 삶에서 고향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가족들에 대한 것으로 시작됐어요.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원천이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던 그리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 71쪽의 「심천역」에는 그날의 두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이다.
고독한 예술가, 그런 나를 사랑한다
2부 '고독과 이별'에는 유독 혼자 있는 장면이 많다.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 새에 자신을 빗댄 그림들이다. 왜 고독을 그리느냐는 물음에 작가는 "밝고 명랑한데 사람들이 내 뒷모습은 참 쓸쓸해 보인다고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고독한 시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덧붙였다.
"삼사 년을 숲에서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오십 년을 돌아봤어요. 이제는 절대 고독을 즐기는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수많은 점을 찍을 때 외롭거나 지겹지 않고, 그냥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시간이 행복해요."
아침에 1층 작업실에 내려와 밤 열두 시까지 홀로 머무는 시간이 그의 예술의 바닥이다. 필자는 129쪽 50번 드로잉 「고독한 사람」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고독한 예술가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한다. 그럼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한가?" 고독을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라 털고 일어서는 힘으로 바꾸는 세 문장이다.
가장 깊은 포옹은 만남과 헤어짐을 동시에 껴안는다
153쪽 61번 「깊은 포옹」을 펼치자 이야기는 작가의 아내이자 동료 화가인 지오최 작가에게로 옮겨 갔다. 1988년 9월 15일, 홍대 문헌관 복도에서 처음 마주친 날짜를 작가는 지금도 기억한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학교에서 몰래 잠을 청하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 4학년 때 결혼해 서른다섯 해를 함께 걸었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병풀이라는 풀이 있죠. 호랑이가 뒹굴어 상처를 치유한다는. 저 사람이 병풀이고 제가 호랑이예요. 저 사람 품에서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왔습니다."
속초 작업실을 오가는 두 시간의 운전길은 두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대화의 시간이다. 어디를 어떻게 그리라는 단계는 지났고, 이제는 그림 그리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깊은 포옹」이 부부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영원할 것 같은 친구들, 영원할 것 같은 동생들과 헤어진 일이 훨씬 많잖아요. 악수하는 순간에 헤어질 준비도 하고 사는 게 맞지 않나. 그래야 겸손해지는 것 같아요. 그 드로잉은 그냥 삶의 포옹이죠."
필자는 이어 207쪽 87번 「걱정 마, 네 옆엔 내가 있어」를 펼쳤다. 멀리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담긴 아주 작은 그림이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거리를 지키되,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것. 예순둘의 작가가 건네는 삶의 거리감이다.
"줄기와 뿌리가 살아 있으면 꽃은 계속 핀다"
대화의 축은 잠시 전시장으로 옮겨 갔다. 정형탁 디렉터는 작가를 25년 넘게 지켜봐 온 기획자다. 2000년대 초 인사동에서 열린 〈동풍전〉에서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 전통 수묵을 다루지만 그 안에 동시대의 일상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 뒤로 동료 작가들과 산으로 들로 실경을 다니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 전시 공간은 도시의 화이트 큐브 느낌도 있지만, 자연이 직접 보이면서 작품을 보는 곳이에요. 시에서 말하는 대구 같은 느낌이죠. 선생님의 「섬」은 바다를 놓아도, 산을 놓아도 다 어울려요. 공간이 주는 파장력이 있습니다."
그는 전시를 '선집'에 빗댔다. 작가의 방대한 작업 가운데 몇 점을 골라 대중 앞에 내놓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걸린 작품은 작업실에 쌓인 것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창고에 남은 그림들 역시 아직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작가의 숨결이 깃든 작품이라고 그는 말했다.
책에서 인상 깊은 드로잉으로 그는 171쪽의 70번 「생각하는 새」와 이어지는 71번 작품을 꼽았다. 작가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그림이라는 이유였다.
"고독과 외로움은 구별되는 감정이에요. 외로움은 쓸쓸한 감정이지만, 고독은 혼자 되는 즐거움이죠. 그 고독을 작업에 어떻게 병치하고 확대하느냐가 작가의 역량입니다."
전시 제목 〈무한화서〉도 그가 지었다.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제목에서 빌린 말이다. 줄기와 뿌리가 살아 있는 한 꽃이 끝없이 피어나는 꽃차례처럼, 삼사십 대에 본 작가와 예순 즈음의 작가가 또 다르다는 뜻을 담았다. 작가는 "예순에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이라며 고마움을 전했고, 객석에서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응원이 돌아왔다.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책의 제목이 된 신작 「질문」은 2026년 7월에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작가는 고민이 있을 때 그 단어를 먼저 쓰고 거기에 맞는 드로잉을 한다고 했다. 올해만 세종, 파주, 설악산 울산바위, 거제도와 하남을 오가며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9월에는 네 전시가 한꺼번에 겹쳤다. "나는 뭐지, 어떻게 사는 거지, 나의 예술은 어디로 가는 거지." 그 물음이 그림이 됐다.
질문의 뿌리는 더 오래됐다. 대학 3학년 때 동아미술제에서 특선을 받은 500호 대작의 제목이 〈어디로 가야 하나〉였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림이었다. 그 물음을 품게 한 것은 스물한 살 무렵 그림을 배우고 싶어 따라다니던 한 선배 화가의 부고였다. 이야기를 이어 가던 작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저한테 질문은 제가 예술가로 가게 만든 계기인 것 같아요."
사회자는 감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지만, 필자 역시 울컥했다. 드로잉에세이는 가벼운 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거운 책이다. 작가는 119쪽 45번 「아버지와 아들」을 가리키며 "제 그림을 들여다보면 다 슬퍼요. 우리 전부 다 외롭지 않나요. 그 외로움이 또 우리를 살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A4 한 장을 한 줄로
객석에서 이진영 교수(철학)가 두 가지를 물었다. 최근 숲 그림에 집중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방향, 그리고 '질문 2'로서 드로잉 예술론 같은 책을 기획해 볼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작가는 글을 많이 쓴다. 2001년 한 달간의 인도 여행에서도 스케치북과 일기를 두 권씩 채워 왔다. "완벽해진 다음에 해야지 하다가 때를 놓쳤다"며, 이제 그림처럼 책도 미루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보시기엔 글 한 줄이잖아요. A4 한 장씩 거의 다 써서 한 줄로 줄인 거예요."
필자와 네 시간씩 드로잉을 두고 나눈 인터뷰로 초고가 나왔지만, 작가는 양해를 구하고 모든 글을 스스로 다시 썼다. 세종 전시가 열린 한 달 동안 낮에는 관객을 만나고 밤에는 열 줄을 다섯 줄로, 다섯 줄을 한 줄로 줄였다. 마감 날 아침에도 밥을 먹고 내려가 또 한 줄을 줄였다. 107개의 한 줄은 그렇게 남은 문장들이다.
숲은 떠나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
숲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2000년대 말부터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는 절벽과 들판을 그렸다. 스무 해 전 스케치북에 그리던 숲이 지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해외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업이 됐다.
"숲에는 삶과 죽음이 다 있어요. 십 년 넘게 숲에 가 보니 어떤 나무는 넘어져 있고 새로운 나무가 자라요. 우리 삶이에요. 숲은 그만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여러 테마 가운데 하나이고 그 숲에서 제가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필자는 마무리에 앞서, 지난 3년간 인스타그램에 400여 편의 그림 감상문 '취향의 기록'을 써 온 경험을 나눴다. 감상문을 쓰면 그림을 더 깊이 보게 된다. 한국작가후원연대가 그림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글로 남기자는 운동을 펼치는 이유다. 오랫동안 작가를 지켜봐 온 한 후배 작가는 질문 대신 "항상 응원한다"는 한마디를 건넸다.
이름 한 자 한 자에 눌러 담은 마음
마지막 인사에서 작가는 화가의 길에 들어선 밤을 들려주었다. 스물한 살, 고향 친구들을 따라 화성 봉담의 파이프 공장에서 한 달 반을 일하던 때였다. 어느 날 막걸리에 취해 논두렁에 누워 별을 보다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되겠구나" 하고 마음먹었다. 이틀 뒤 충북 영동에서 데리러 온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올라와 입시를 시작했다.
"지난 40년 진짜 치열하게 왔고요. 여기 나온 드로잉에 있는 저의 기록들을 또 기록하면서 청년처럼 살아갈 테니까, 많이 사랑하고 응원해 주세요."
토크가 끝나자 작가는 곧바로 사인 테이블에 앉았다. 예약구매로 책을 기다려 온 독자 20여 명의 이름이 책 첫 장에 한 자 한 자 적혔다. 펜 끝에 힘을 실어 이름을 눌러 쓰는 동안, 책 속 드로잉 한 점이 독자 한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것 같았다.
현장에서 책을 산 독자들은 더 큰 호사를 누렸다. 작가는 이름과 함께 그 사람을 위한 드로잉을 즉석에서 그려 넣었다. '청솔'이라는 이름에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삶을 나무로 여긴다는 독자에게는 나무를, 먼 길 떠나는 이에게는 "구름 타고 멀리 가라"는 말과 구름을 그렸다. 책을 받아 든 독자들은 표지보다 먼저 그 한 장을 펼쳤다. 사인회는 예정보다 길게 이어졌고, 한주아트스페이스가 마련한 다과 옆에서 담소가 오갔다.
기획자의 후기 — 질문은 답이 아니라 길이다
책을 기획하며 필자가 붙든 화두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이날 현장에서 그 물음은 책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심천역의 소년, 논두렁에 누운 스물한 살의 청년, 숲에서 점을 찍는 예순의 화가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추니박의 질문은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다. 그는 물음을 던지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 사이에서 나온 107개의 한 줄은 독자에게 돌아가 또 다른 질문이 된다. 책 첫 장에 눌러 쓴 이름들은 그 질문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명단이다. 줄기와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이 화가의 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다.
전시 안내 추니박 개인전 〈무한화서〉 | 2026. 9. 19 – 12. 20 | 한주아트스페이스 전관 (경기 파주시 번뛰기길 145)
도서 안내 《추니박 드로잉에세이 — 질문》 추니박 글·그림 | 한국작가후원연대 출판지원 프로젝트 그림에세이 시리즈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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