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3] 통섭: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의 리더십 - <AI시대를 예술로 준비하는 리더십> || 칼럼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어제 10,653명
오늘 4,762명
홈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 칼럼
칼럼 (20)

Column 미술계 이슈와 전시, 시장, 문화, 동시대 예술 흐름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글을 전합니다. 필진과 에디터의 시선을 통해 변화하는 아트 신(scene)의 흐름과 담론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연재03] 통섭: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의 리더십 - <AI시대를 예술로 준비하는 리더십>    네이버 구글

페르메이르의 빛 속에서 발견한 연결의 기술
이상민   승인 2026.11.08 21:48  |  최종 수정 2026.11.08 21:58
a b

연재명 : AI시대를 예술로 준비하는 리더십 (총 12회)

01회차 취향 / 경영자는 왜 미술관에 가야 하는가

02회차 안목 / 안목: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경영의 눈

03회차 통섭 / 통섭: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의 리더십

04회차 협업 / 협업: 거인들도 홀로 서지 않는다

05회차 관점 / 줌 아웃: 관점을 확장하는 리더의 기술

06회차 직관 / 직관: 압축된 경험이 만드는 결정의 힘

07회차 상상력 / 상상력: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보는 힘

08회차 미적감수성 / 미적 감수성: 감도가 곧 경쟁력인 시대

09회차 회복탄력성 / 애질리언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탄력성

10회차 문제 재정의 / 문제 재정의: 질문을 바꾸는 자가 미래를 만든다

11회차 큐레이션 / 큐레이션 리더십: 선택하고 버리는 결단력

12회차 인간다움 / 인간이라는 유일한 예술: AI 이후 리더의 본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2층, '명예의 전당(Gallery of Honour)' 끝자락에 작은 방 하나가 있다. 가로 45.5cm, 세로 41cm. 제목은 〈우유 따르는 여인(Het melkmeisje)〉.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가 1658년경에 그린 이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이상하게 오래 머문다. 커다란 역사화들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 이 작은 그림 앞에 서면, 공간의 온도가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 무엇이 이 그림을 이토록 강렬하게 만드는가. 처음에는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 '머무름'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페르메이르의 통섭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b08b4ce4724d805d5d71cb1a71a3ea0f_1794141899_9739.jpg

① 페르메이르 〈우유 따르는 여인〉(1658경)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여인은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묵직한 도기 항아리에서 우유가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여인의 어깨와 항아리, 테이블 위의 빵 조각을 하나씩 밝힌다. 이 장면이 전부다. 서사도 없고 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 중 하나였고, 오늘날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그림을 '우리나라의 모나리자'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림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페르메이르는 왜 하필 부엌의 하녀를 그렸을까. 당시 그림 시장의 '정답'은 성경 이야기, 귀족의 초상, 신화 장면이었다. 페르메이르는 그 경계를 가볍게 넘었다. 종교화의 빛, 과학의 광학, 음악의 리듬, 철학의 정적—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들을 하나의 부엌 장면 위에 통합했다. 이것이 통섭이다. 그리고 이 통섭이 400년 후 경영자의 언어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페르메이르는 그것이 통섭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보는 것을 가장 정직하게 그렸을 뿐이다. 통섭은 의도보다 태도에서 비롯된다.

통섭(統攝): 큰 줄기를 잡아 연결하는 힘

통섭(統攝)은 '큰 줄기(統)'를 '잡다(攝)'는 뜻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O. Wilson)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인식 체계로 통합하자며 제안한 개념이고, 최재천 교수가 한국에 소개하면서 지식 융합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통섭은 단순히 여러 분야를 섞는 '비빔밥'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경계를 넘나들며 화학적 결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비빔밥은 재료들이 각자의 맛을 내다가 섞이는 것이지만, 통섭은 두 재료가 반응해 제3의 맛을 만들어내는 화학 반응에 가깝다. 페르메이르의 부엌이 그 반응의 현장이었다.

AI 시대에 통섭이 더욱 절박해진 이유가 있다. AI는 한 분야를 깊이 파는 전문성에서는 이미 인간을 앞서고 있다. 방대한 의학 논문을 학습한 AI는 웬만한 전문의보다 더 빠르게 진단한다. 법률 문서 분석은 AI가 더 정확하다. 단일 영역의 지식은 AI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영역을 연결해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서로 다른 분야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며 예상치 못한 접점을 발견하는 능력 - 이것은 아직 인간의 영역이다. 의사이면서 동시에 디자이너의 눈으로 병원 경험을 재설계한 사람, 음악가의 귀로 소음 공해를 해결한 엔지니어 - 이들이 만들어낸 혁신은 한 분야의 깊이만으로는 나올 수 없었다.

통섭적 리더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하나의 분야에 충분히 깊이 들어가 본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것은 통섭이 아니라 산만함이다. 페르메이르가 광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빛을 예술로 번역할 수 있었듯, 통섭은 각 영역에 대한 충분한 이해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다음, 그 깊이 위에서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것. 한 우물을 깊이 판 사람이 옆 우물의 물맛을 가장 잘 구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경영자에게 통섭은 자신의 전문 영역 밖에서 한 가지를 더 깊이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두 번째 우물이 생기는 순간, 두 우물 사이에 새로운 통로가 열린다.

〈진주 귀걸이 소녀〉: 경계 위에 선 작품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는 페르메이르의 또 다른 걸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Meisje met de parel)〉(1665)가 있다. 이 그림은 장르의 경계 자체가 모호하다. 초상화인가? 아니다, 특정 인물을 기념하는 초상화가 아니다. 역사화인가? 아니다, 어떤 사건도 담기지 않았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트로니(tronie)'라는 독특한 장르가 있었다. 특정 인물이 아닌, 인간의 표정과 감정 자체를 탐구하는 두상 연구화. 페르메이르는 트로니의 형식을 빌리되, 거기에 빛의 물리학과 심리적 긴장감을 더했다. 어떤 장르로도 완전히 분류되지 않는 이 그림은 바로 그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토록 강렬하다.

 

b08b4ce4724d805d5d71cb1a71a3ea0f_1794141942_7251.jpg

② 페르메이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1665) —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소녀는 돌아보고 있다.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다 방금 이름이 불린 사람처럼, 막 고개를 돌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을 포착했다. 입술은 살짝 열려 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제 막 말을 들은 건지 모른다. 확정되지 않은 순간,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경계. 페르메이르는 평생 이 '경계'에서 그림을 그렸다. 결정되지 않은 순간에 머무는 것—그것이 통섭적 사고의 자세이기도 하다. 섣불리 한쪽으로 분류하지 않고, 두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채 더 좋은 질문을 기다리는 것.

통섭적 사고도 이 경계에서 작동한다. 한 분야의 언어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두 영역 사이 어딘가에 서서 양쪽을 동시에 보는 상태. 스티브 잡스가 강조했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intersection of technology and liberal arts)'가 바로 이 자리다. 한쪽에만 서 있으면 교차로가 보이지 않는다. 잡스가 캘리그래피 수업을 들었을 때, 그것이 언젠가 맥(Mac)의 폰트 디자인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결국 일어났다. 통섭은 계획된 융합이 아니라, 경계 위에 오래 서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다.

트로니(tronie)라는 장르 자체도 통섭의 산물이다. 초상화의 기술과 역사화의 서사, 장르화의 일상성을 모두 흡수하되 어느 것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새로운 형식.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들이 이와 닮아있다. 우버는 운송업인가, IT 플랫폼인가. 에어비앤비는 숙박업인가, 커뮤니티 서비스인가. 넷플릭스는 방송국인가, 기술 회사인가. 기존 카테고리로 설명되지 않는 이 회사들은 모두 경계 위에 서 있다. 그 경계에서 탄생한 새로운 장르가 산업 전체를 재편했다. 통섭적 리더가 만들어야 할 것은 기존 분야의 개선이 아니라, 페르메이르의 트로니처럼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새로운 카테고리다.

〈편지를 읽는 여인〉: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읽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편지를 읽는 여인(Brieflezende vrouw in het blauw)〉(1663)을 보자. 임신한 듯 보이는 여인이 창가에 서서 편지를 읽고 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남편인가, 연인인가. 편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림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페르메이르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겼다. 우리는 여인의 표정에서, 손가락이 편지를 쥔 방식에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림 속에 없는 것을 그림 밖에서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것이 페르메이르가 관객을 통섭의 공동 창작자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b08b4ce4724d805d5d71cb1a71a3ea0f_1794141970_547.jpg

③ 페르메이르 〈편지를 읽는 여인〉(1663)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이 그림이 통섭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방식이 있다. 페르메이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그렸다. 여인의 몸짓은 보이고, 편지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강하게 우리를 당긴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보고서에 적힌 숫자는 보이는 것이고, 그 숫자를 만들어낸 팀원들의 동기와 두려움과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통섭적 리더는 이 두 층위를 동시에 읽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층위를 읽기 위해서는 숫자 바깥의 언어—심리학의 언어, 사회학의 언어, 때로는 예술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통섭이 단순한 지식 확장이 아닌 이유다.

페르메이르가 평생 그린 그림은 35점 남짓이다. 렘브란트가 수백 점을 남긴 것에 비하면 극도로 적다. 그러나 그 적은 수의 그림들이 서양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각각의 작품이 하나의 완전한 우주이기 때문이다. 빛의 물리학, 일상의 철학, 심리학, 공간감, 색채 이론—이 모든 것이 45cm짜리 캔버스 안에 녹아 있다.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깊이 통합하는 것. 페르메이르는 양보다 밀도를 선택했고, 그 밀도가 400년을 버텼다. 통섭의 결과물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 밀도는 미술관 한 방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통섭의 결과물은 양이 아니라 깊이로, 면적이 아니라 밀도로 평가된다. 리더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많은 결정보다 깊이 통합된 하나의 결정이 조직을 바꾼다.

통섭을 경영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구체적이다. 자신의 전문 언어 외에 하나의 '이질적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재무 전문가라면 디자인 씽킹의 언어를, 기술 전문가라면 인류학의 언어를, 마케터라면 데이터 과학의 기초를. 완전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 언어로 쓰인 글을 읽고 그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페르메이르가 광학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빛의 원리를 예술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해를 가졌듯이. 두 번째 언어를 갖는 순간, 그 리더는 두 세계 사이의 통역사가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가장 희소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전문가들의 언어를 연결하는 통역사다.

AI가 하나의 영역을 깊이 파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두 개의 깊은 우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지식들을 한 문장으로 번역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한다. 페르메이르의 부엌이 예술이 된 것은 그가 빛을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빛, 일상, 침묵, 시간과 같은 서로 다른 층위의 언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통섭의 힘이고, AI 시대 리더가 훈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이다. 페르메이르가 35점으로 역사를 바꿨듯, 통섭의 리더는 하나의 결정으로 산업을 바꾼다.

다음 달에는 루벤스와 얀 브뤼헐이 함께 그린 공동 작업 앞에 선다. 거인들도 홀로 서지 않는다는 이야기, '협업'이 주제다.

b08b4ce4724d805d5d71cb1a71a3ea0f_1794142049_9657.jpg

한국생산성본부 <월간품질경영> KSA 매거진 - 연재명 : 명화와 마주한 경영자 2026년 9월호

       

b08b4ce4724d805d5d71cb1a71a3ea0f_1794142067_2572.jpg

한국생산성본부 <월간품질경영> KSA 매거진 - 연재명 : 명화와 마주한 경영자 2026년 9월호



이 칼럼에서 소개한 명화

① 페르메이르 〈우유 따르는 여인〉(1658경)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② 페르메이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1665) —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③ 페르메이르 〈편지를 읽는 여인 (1663)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글쓴이: 이상민

미술인문학자·커뮤니케이션 연구자. 연세대 수학·중앙대 대학원 언론학 전공. 전략기획 컨설팅펌 이노바랩(주) 대표,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통섭과 협업, AI 이후 인간의 전략』 『통섭미술관기행·네덜란드』 저자.



0 Comments
아트인코리아 그림감상문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