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심층전시리뷰] 김윤신 《새로운 연속》,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산술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1 + 1 = 1’이라고 쓰면 빨간 빗금이 그어진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필자에게도 그 식은 오랫동안 오답이었다. 그런데 김윤신의 작품 앞에서 그 오답이 정답으로 뒤집히는 순간을 보았다. 둘을 더해도 하나, 둘로 나누어도 하나. 아흔한 살의 조각가 김윤신이 반세기 가까이 거의 모든 작품에 붙여 온 이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새로운 연속(In the Continuum)》은 작가가 40년의 아르헨티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이 갤러리에서 처음 여는 개인전이다. 올봄 호암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 퐁피두센터 한화의 정원 프로젝트에 이어지는 자리다. 1층에는 최근의 ‘회화-조각’과 신작 회화가, 2층에는 아르헨티나 시절인 2000년대의 회화가 걸렸다. 과거와 현재를 한 공간에 나란히 놓은 구성 자체가 제목처럼 하나의 ‘연속’을 이룬다.
먼발치에서 존경하던 작가를 가까이 뵙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필자가 기획한 권순익 작가의 그림에세이 『틈에서 빛으로』에 선생께서 추천사를 써 주시면서 인연이 깊어졌고, 작품 너머의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오프닝을 다녀오는 길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산술의 수학적 의미만큼은 수학을 공부하고 예술을 이야기해 온 필자가 써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다.
1 + 1 = 1 : 더해도 불어나지 않는 산술
먼저 ‘합이합일’부터 보자. 일상의 산수에서 1 + 1은 2다. 하지만 수학에는 1 + 1 = 1이 참인 세계가 엄연히 있다. 컴퓨터를 움직이는 논리의 바탕, 불 대수(Boolean algebra)다. 19세기 영국 수학자 조지 불(George Boole)의 이름을 딴 불 대수는 참과 거짓을 1과 0으로 나타내 논리 관계를 계산한다. 여기서 ‘참 또는 참’은 여전히 ‘참’, 곧 1 + 1 = 1이다. 집합도 그렇다. 어떤 집합을 자기 자신과 합쳐도(A∪A) 남는 것은 그 집합 그대로다. 수학자들은 더해도 불어나지 않는 이 성질을 ‘멱등성(idempotence)’이라 부른다.
그러나 김윤신의 1 + 1 = 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불 대수의 1은 더해져도 변하지 않지만, 김윤신의 1은 더해지는 순간 전혀 다른 1이 된다. 작가가 자신의 영혼을 나무에 ‘더하면’ 작가도 나무도 아닌 제3의 존재, 곧 작품이 태어난다. 작가가 “나무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이 등식의 증명이다. 오늘날 복잡계 과학이 ‘창발(emergence)’이라 부르는 현상, 곧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를 작가는 1970년대에 이미 끌과 망치로 증명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6-538〉, 1996, 알가로보 나무, 138×30×30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1 ÷ 2 = 1 : 나누어도 줄지 않는 무한
다음은 ‘분이분일’이다. 산수에서 1 ÷ 2는 ½, 반쪽이다. 그런데 생명은 이 산수를 거부한다. 세포 하나가 둘로 분열하면 반쪽 세포 둘이 아니라 온전한 세포 둘이 생긴다. 수학에도 이런 나눗셈이 있다. 프랙털은 아무리 잘게 나누어도 조각 하나하나가 전체를 닮은 온전한 모양이다. 더 극단적인 예도 있다. 공 하나를 몇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맞추면 원래와 똑같은 공 두 개가 된다는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다. 현실에서는 잘라낼 수 없는 조각에 관한 사고실험이지만, 분이분일을 이보다 정확하게 보여 주는 예도 드물다.
이번 전시의 평면 작업에서는 이 나눗셈이 화면 위에서 그대로 일어난다. 큰 면이 작은 면으로, 작은 면이 더 작은 삼각형과 마름모로 쪼개진다. 작가는 물감을 쌓아 올리고(合) 나이프로 긁어낸다(分). 그런데 쪼개질수록 화면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풍성해진다. 가로 180cm의 대작 〈영혼의 빛 2026-14〉를 채운 수백 개의 삼각형은 나뉘었다기보다 증식한 것처럼 보인다.
김윤신, 〈영혼의 빛 2026-14〉, 2026, 캔버스에 아크릴, 150×180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영혼의 빛 2026-14〉 부분. 큰 면이 작은 삼각형으로 쪼개지며 화면이 증식한다.
1888년 독일의 수학자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무한’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 자신의 일부와 빠짐없이 일대일로 짝지을 수 있는 집합, 곧 부분이 전체와 같아지는 집합이 무한이라는 것이다.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것, 그것이 수학이 말하는 무한이다. 김윤신의 분이분일은 바로 이 무한의 정의를 나무와 물감으로 번역한 것이다.
씨앗을 흩뿌리는 사람 — 2000년대 회화의 디아스포라
2층에 오르면 시간이 25년쯤 거꾸로 흐른다. 작가가 아르헨티나에 살던 2000년대의 회화, 〈환희(Jubilance)〉 〈원초적 생명력(Primal Vitality)〉 〈내 영혼의 노래(Song of My Soul)〉 연작이 걸려 있다. 대부분 가로세로 50cm 남짓한 작은 캔버스인데, 화면마다 씨앗 같은 형상이 바람에 날리듯 흩어져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씨앗을 흩뿌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디아스페이레인(diaspeirein)에서 왔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본래는 파종의 언어였던 것이다. 원산에서 태어나 전쟁 통에 서울로 내려오고, 파리를 거쳐 마흔아홉에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간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 흩뿌려진 씨앗의 궤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서의 방향이다. 이주 작가의 그림이라면 흔히 그리움과 상실의 회색을 떠올린다. 그런데 김윤신의 2000년대 화면은 ‘환희’다. 〈환희 2001-5〉의 푸른 회색 조각들은 철새 떼처럼 한 방향으로 솟구치고, 〈내 영혼의 노래 2004-28〉의 붉은 흙빛 위에서는 막 뿌려진 씨앗들이 눈을 틔운다.
김윤신, 〈환희 2001-5〉, 2001, 캔버스에 유채, 50.2×40.8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김윤신, 〈내 영혼의 노래 2004-28〉, 2004, 캔버스에 유채, 50×40.5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2001년은 아르헨티나가 국가부도 사태로 휘청이던 해다. 그 한복판에서 예순여섯의 이방인이 그린 것이 ‘환희’였다는 사실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의 디아스포라는 뿌리 뽑힘의 슬픔이 아니라, 낯선 땅에 다시 뿌리 내리는 생명의 기쁨이었다.
색채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아르헨티나의 토착 나무와 돌, 남미 토테미즘의 문양과 색에서 한국의 그것과 놀랍도록 닮은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내 영혼의 노래 2008-7〉과 〈내 영혼의 노래 2008-21〉의 붉은색, 초록, 청록, 황토색이 어딘가 오방색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지구 반대편에서 고향의 색을 다시 만난 것, 이것이야말로 디아스포라가 빚어낸 합이합일이다. 한국과 남미라는 서로 다른 둘이 만나 ‘김윤신의 색’이라는 하나가 되었다.
김윤신, 〈내 영혼의 노래 2008-7〉, 2008, 캔버스에 유채, 50×40.5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노래하는 나무 — 나무를 떠난 나무가 다시 노래할 때
1층의 주인공은 ‘회화-조각’이다. 시작은 소박했다. 코로나19로 작업실에 갇혀 새 나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작가는 집을 짓고 남은 나뭇조각을 주워 색을 입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나무조각을 알루미늄과 브론즈로 주조하고, 그 위에 다시 아크릴로 그림을 그린다. 제목은 〈노래하는 나무(Tree Full of Songs)〉다.
이 과정을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문법으로 읽으면 놀랍도록 정확하다. 나무 원작에서 금속의 쌍둥이가 나뉘어 나오고(分), 그 쌍둥이마다 서로 다른 색이 더해진다(合). 하나의 형태가 여러 개의 온전한 하나로 갈라지는 것이다. 작가 자신도 형태는 하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수학의 언어로 바꾸면 구조는 보존되고 얼굴만 바뀌는 ‘동형(isomorphism)’의 미학이다.
작품 번호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김윤신의 작품 제목은 ‘연도-일련번호’로 된 일종의 좌표다. 여기에 ‘U1’ 같은 기호가 붙으면 그 원작에서 갈라져 나온 새 판본이 된다. 그 예가 1층에서 만나는 높이 154cm의 〈노래하는 나무 1984-11U1〉(2025)이다. ‘1984-11’은 작가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뒤 만든 첫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4-11〉의 번호다. 이민의 첫 작품이 41년 만에 금속의 몸을 얻고 화려한 색을 입은 채 모국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가의 귀향이 작품 번호 하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노래하는 나무 1994-506U1〉 〈노래하는 나무 1997-612U1〉처럼 아르헨티나 시절의 작품들도 2026년의 몸으로 돌아왔다.
김윤신, 〈노래하는 나무 1984-11U1〉, 2025, 알루미늄에 아크릴, 154×55×52cm.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에 예술작품이 ‘아우라’, 곧 지금 여기에 하나뿐인 존재감을 잃는다고 했다. 주조는 본래 복제의 기술이다. 그런데 김윤신은 복제된 금속 위에 다시 손으로 그림을 그려 모든 판본을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되돌린다. 복제 위에 손을 얹어 아우라를 되살리는 셈이다.
브론즈 표면에는 원래 나무의 껍질 결과 톱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노래하는 나무 2023-32U1〉에서는 거친 나무껍질 무늬 위로 파랑과 분홍이 지나간다. 재료는 바뀌어도 나무의 기억은 이어진다. 베어져 죽은 나무가 금속이 되어 다시 노래한다. 그것은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일군 작가의 생애와 꼭 닮았다. 나무에서 금속으로 건너간 재료의 이주, 또 하나의 디아스포라인 셈이다.
김윤신, 〈노래하는 나무 2023-32U1〉, 2026, 브론즈에 아크릴, 50×19×15.5cm(좌대 제외).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연속체 위의 한 점
전시 제목의 ‘Continuum’ 역시 수학 용어다. 수학에서 연속체는 틈 없이 이어진 실수의 직선을 뜻한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그 직선 위 0과 1 사이, 짧은 한 토막에도 직선 전체와 똑같이 많은 점이 있음을 증명했다. 부분이 전체와 같은 크기를 갖는 세계, 앞서 말한 무한의 세계다.
김윤신의 70년도 그렇다. 2001년의 〈환희〉와 2026년의 〈영혼의 빛〉 사이에는 끊긴 데가 없다. 1984년의 첫 이민 작품과 2025년의 〈노래하는 나무〉 사이에도 없다. 어느 한 시기를 잘라 보아도 그 안에 작가의 전부가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삶의 ‘틈’에서 빛을 찾는다. 김윤신은 이주와 귀향이라는 그 큰 틈마저 연속의 일부로 끌어안는다.
김윤신, 〈영혼의 빛 2026-35〉, 2026, 캔버스에 아크릴, 70.4×90.4cm.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 작가 및 리만머핀 제공
나누어도 줄지 않고, 더해도 넘치지 않는 것. 이태원의 전시장에서 본 것은 아흔한 살 조각가가 평생에 걸쳐 써 내려간 무한의 증명이었다.
작가 소개 | 김윤신(金潤信, 1935~)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59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했다. 1969년 귀국해 상명여대에서 조각을 가르쳤고, 19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참여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40년간 작업했으며,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한인 이민자 최초의 미술관인 김윤신미술관을 세웠다.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개인전을 계기로 재조명되어 2024년 국제갤러리·리만머핀과 전속 계약을 맺고, 같은 해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되었다. 2026년 호암미술관에서 생애 첫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과 하버드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여전히 전기톱을 들고 작업한다.
전시 정보
• 전시명: 김윤신 《새로운 연속(In the Continuum)》
• 기간: 2026년 11월 5일~12월 24일
• 장소: 리만머핀 서울(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13)
• 구성: 1층 회화-조각과 신작 회화, 2층 2000년대 회화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