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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계를 건너 미술을 번역하는 사람,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오영민 교수가 걸어온 길    네이버 구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적 지형을 그려가는 사람.”
아띠플   승인 2026.10.0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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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건너 미술을 번역하는 사람

한국에서 대만으로 다시 베이징으로  중앙미술학원 오영민 교수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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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처럼 거대한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때로 약속보다 인연에 가깝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가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오래된 친구와 지인을 따라 이어진 연결 끝에 중앙미술학원에서 한국미술사를 가르치는 오영민 교수를 만났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대만에서 중국미술사를 공부한 뒤,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교육기관인 중앙미술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이제 그는 베이징의 강단에서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의 미술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그의 이력을 한 줄로 정리하면 반듯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한 줄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반듯하지도, 수월하지도 않았다. 오 교수의 이야기는 ‘재능을 발견한 소녀’보다 ‘반대를 이겨낸 소녀’에게서 시작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평생 못할 것 같았어요

오 교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험은 딸의 진로를 지지하는 이유가 아니라, 다시 미술을 만류하는 이유가 되었다.

오 교수 역시 처음부터 순조롭게 미술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미술을 시작하지 않으면 앞으로 평생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싸워서 이기고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죠.”

입시미술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기였다. 공부와 실기를 병행하며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마음처럼 정교하게 나뉘지 않았다. 결국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조금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지도교수의 한마디가 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한국에는 미술 실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네가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온다면 분명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교수는 대만 유학을 권했다. 그렇게 화가를 꿈꾸던 학생은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에서, 작품이 놓인 시대와 사회를 읽는 사람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다.

장학금보다 어려운 학교를 선택하다

지도교수는 자신의 모교인 대만 중국문화대학교를 추천했다. 장학금과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 교수는 안정적인 제안 대신 국립대만사범대학교를 선택했다.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말은 멋지지만 그 선택에는 곧바로 청구서가 따라왔다. 장학금은 포기했고 수업은 어려웠으며, 중국어 실력은 대학원 토론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대만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받은 뒤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상 회화와 학문 언어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강이 놓여 있었다. 수업 자료는 영어로 읽고, 발표와 토론은 중국어로 해야 했다. 그의 책상에는 중국어 사전과 영어 사전이 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 중국어 실력으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려니 정말 막막했어요. 열 명, 열다섯 명이 토론하는데 외국인은 저 혼자였거든요. 제가 말 한마디만 하면 모든 시선이 저에게 집중됐어요.”

지금은 웃으며 꺼낼 수 있는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매주 긴장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는 대만 유학 생활을 ‘그때는 정말 지옥 같았다’고 솔직하게 회상했다. 지금도 대만에 놀러 가자는 이야기를 들으면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름다운 관광지보다 밤늦게까지 펼쳐두었던 두 권의 사전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유학 생활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그대로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오히려 긴 세월을 통과한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다.

대만의 석사 연구생에서 중앙미술학원의 박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오 교수에게 지도교수는 다시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을 계속하려면 석사학위만으로는 부족하니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도 고려했지만 박사과정이 길어질 수 있다는 부담과, 다시 영어로 모든 학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컸다. 결국 그는 중국 본토를 선택했다.

석사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2006년 중앙미술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중국회화사 연구의 권위자인 쉬용니엔(薛永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송·원·명·청 회화사를 전공했다. 200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만에서 중국어와 영어 사이를 오가며 혹독한 훈련을 거친 시간은 베이징에서 비로소 힘을 발휘했다. 그가 한때 돌아가는 길이라고 여겼던 선택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를 꿈꾸며 시작한 동양화,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중국미술사, 대만에서 익힌 학문적 언어, 그리고 중국 미술사의 중심에서 이어간 연구. 그의 이력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그 우연을 실제 기회로 바꾼 것은 결국 매 순간의 선택과 버팀이었다.

2009년부터 지켜온 베이징의 강단

오 교수는 2009년부터 중앙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2026년을 기준으로 어느덧 17년에 이르는 시간이다. 인터뷰 도중 ‘이제 곧 20주년이니 파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네자, 그는 웃으며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

“남편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힘들 때마다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예요. 코로나 때도 그랬겠죠. 그런데 남편이 중국 사람이다 보니 제가 이곳에서 계속 강의하며 자리를 지켰던 것 같아요.”

‘남편 덕분에 남았다’는 말은 단순히 생활의 근거지가 중국이라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오 교수와 남편은 중앙미술학원 동문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미술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고, 작품을 본 뒤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영화 분야에서 일하는 남편은 한국 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인공지능 기반 영상과 영화 제작 환경에도 주목하고 있다.

국제결혼의 장점을 묻자 오 교수는 잠시 ‘좋은 것만 이야기해야 하나요?’라며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답은 분명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구분에 앞서 두 사람이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술이라는 공동 언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미술과 영화를 매개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각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 두 사람의 결혼은 서로 다른 국적의 결합이기 이전에 예술을 사랑하는 두 동문의 긴 대화에 가까워 보였다.

수업 시간에는 졸아도 과제는 놀랍다

오 교수는 중앙미술학원에서 전공과 교양 수업을 함께 맡아왔다. 세계미술사 안에서 한국미술사를 다루는 전공 수업을 비롯해 한국미술사, 한국의 시각문화와 물질문화 등 한국 문화와 관련된 과목을 가르친다.

중앙미술학원에는 미술사 전공자뿐 아니라 회화, 조형, 디자인 등 다양한 실기 분야의 학생들이 모인다. 그렇다면 중국 전역에서 선발된 이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범생들일까. 오 교수의 대답은 뜻밖에도 솔직했다.

“교양 수업에 들어오는 실기 전공 학생 중에는 수업 시간에 자거나 다른 일을 하는 학생도 많아요. 집중을 잘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죠. 그런데 과제를 내주면 정말 놀랄 만큼 잘해 와요.”

발표 자료의 구성은 탄탄하고 자료 수집과 분석도 정확하다. 창작 결과물에는 예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담긴다. 수업 시간에는 듣지 않는 듯 보였던 학생들이 과제에서는 교수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전공과 한국의 미술·문화를 능숙하게 연결해낸다.

“그럴 때 이 학생들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구나, 정말 예술가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의 강점은 단순한 손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능력, 자료를 수집하고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하는 사고력, 자신의 작업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발표력까지 고르게 갖추고 있다.

조금 졸았다고 해서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예술가의 집중력은 때로 교수의 눈에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오교수는 평소 학생들에게 “우리는 결코 평범하면 안된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라고 했던 말을 학생들이 아주 잘 실천하고 있는 셈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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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 펼쳐지는 입시 작품들

중앙미술학원에는 중국 각지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학생들이 모인다. 수많은 지원자의 실기작품을 운동장에 펼쳐놓고 교수진이 이동하며 심사하는 광경은 이곳의 입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 가운데에는 학생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 높은 작업도 적지 않다. 이미 전문 작가 수준의 실기 능력을 갖춘 지원자도 눈에 띈다. 그러나 실기만 뛰어나다고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업 성적을 비롯한 여러 조건을 함께 충족해야 한다.

한국의 미술대학 입시가 점차 학업 성적과 학생부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과 비교하면, 중국은 여전히 소묘와 수채화 등 탄탄한 실기 훈련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넓은 대륙 곳곳에서 오랜 시간 훈련해온 학생들이 한곳에 모이는 만큼 경쟁의 규모와 밀도도 상당하다.

입학생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베이징 출신 학생에게도 학교 내 생활 공간이 배정된다. 현재 기숙사 생활이 절대적인 의무는 아니지만, 학교는 학생들이 공동생활을 경험하도록 권장하고 관리한다.

학생들은 필요에 따라 학교 밖에 별도의 작업실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 그 공간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의 창작과 공동체 생활이 캠퍼스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나를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의 분위기가 가장 따뜻해진 순간은 교수나 연구자로서의 성취가 아니라,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오 교수는 출산 이후 지금까지도 일을 계속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가까이에서 육아를 도와줄 조부모가 없었고, 남편은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 두세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수업이 많은 학기와 남편의 촬영 일정이 겹치면 일과 육아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한 생각은 하나였다.

“아이가 나중에 커서 ‘우리 엄마가 이런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지 않을까. 그 생각을 믿고 버텼던 것 같아요.”

그 믿음이 현실로 돌아온 순간도 있었다. 어느 날 아이의 학교에서 만난 미술 선생님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우리 엄마는 중앙미술학원 교수예요’라고 자랑하며, 선생님을 엄마가 일하는 현장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보며 그 세계를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녀에게 직접 듣는 것과 제삼자를 통해 그 마음을 전해 듣는 감동은 조금 다르다. 엄마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아이는 엄마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놓지 않았던 믿음이 아이의 입을 통해 돌아온 순간이었다.

10년 후 아시아미술사를 들고 미국의 강단으로

10년 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오 교수는 출산 이후 조금씩 희미해진 도전 의식을 다시 끌어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지금 중국어로 가르치는 것은 한국미술사다. 앞으로는 중국미술사와 한국미술사를 함께 바라보는 아시아미술사의 관점으로 연구와 강의의 범위를 넓히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그 내용을 미국 대학에서도 강의해보고 싶다는 계획도 품고 있다.

이 꿈은 막연한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미국 마이애미의 플로리다 국제대학 부설 미술관에서 방문학자로 머문 경험이 있다. 당시의 연구 환경과 경험이 무척 좋았고, 그곳에서 만난 중국인 교수들과도 인연을 이어왔다.

그중 한 교수는 ‘언제든 미국에서 강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한국미술사를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제안했다.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말은 오 교수의 마음 한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는 의미에서 그 도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대만에서 중국미술사를 배웠으며, 중국에서 한국미술사를 가르쳐온 연구자. 이제 그 경험을 아시아미술사라는 더 넓은 시야로 확장해 영어권의 강단과 연결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경력의 이동이 아니다. 그가 지나온 세 지역과 언어를 하나의 지적 궤적으로 묶는 일이 될 것이다.

이론의 시간을 지나 다시 붓 앞으로

오 교수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석사과정 이후 오랫동안 미술사 연구와 강의에 집중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럼에도 전시장에서 작품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같은 문장이 되살아난다.

“언젠가는 꼭 다시 붓을 들 거예요.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영감도 많아요. 그런데 학교 일과 집안일을 함께하다 보면 실제 작업으로 옮길 여유가 부족해서 자꾸 놓치게 돼요.”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장벽은 거대한 캔버스가 아니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좋은 재료를 마련하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의미 있는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이 첫 붓질을 자꾸 내일로 미루게 한다.

그래서 인터뷰 자리에서 조금 다른 방식의 시작을 제안했다. 반드시 큰 작품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종이 한 장, 짧은 문장 하나, 그날 본 풍경의 작은 흔적 하나라도 꾸준히 남긴다면 그것이 쌓여 한 권의 책이 되고 하나의 전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오 교수는 ‘좋은 방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온 사람이 다시 그리는 그림은 과거의 그림과 같을 수 없다. 그 안에는 한국과 대만, 중국에서 축적한 시간과 수많은 작품을 바라보며 길러온 시선,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들의 질문, 엄마와 아내로 살아온 일상의 조각들이 함께 스며들 것이다.

그림 옆에 짧은 글이 놓일 수도 있고, 미술사적 사유와 하루의 기록이 한 화면에서 만날 수도 있다. 거대한 작품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의 흔적 하나를 남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영민 교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작가로의 귀환’일지 모른다.

한국미술을 가르친다는 것

오영민 교수의 삶에는 여러 경계가 겹쳐 있다. 실기와 이론, 한국과 대만과 중국, 연구자와 교육자, 교수와 엄마의 경계다. 그는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기보다 그 사이를 꾸준히 오가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그는 대만에서 중국미술사를 배웠고, 베이징에서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미술사를 가르친다. 한 문화권의 미술을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서로 다른 역사와 감각 사이에 이해의 통로를 놓는 작업이다.

오 교수의 강의실에서 한국미술은 하나의 완성된 답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중국 학생들의 전공과 만나 새로운 논문과 발표가 되고,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창작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한국을 새롭게 발견하고, 교수 역시 학생들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한국미술을 다시 바라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교수’라는 직함보다 ‘번역자’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언어만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 이미지와 생각을 이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자신부터 수많은 경계를 건너온 사람 말이다.

미술을 반대하던 가족을 설득했던 소녀는 이제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또 다른 문화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그의 여정은 처음부터 설계된 직선이 아니었다. 몇 번의 망설임과 우회가 있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가 빈 화면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듯, 오영민 교수는 주어진 조건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의 시선은 중국의 강단을 넘어 언젠가 미국에서 펼쳐질 아시아미술사 강의와, 다시 마주하게 될 붓끝을 향하고 있다.

어쩌면 오영민 교수의 삶을 관통하는 힘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른다.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적 지형을 그려가는 사람.”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한국미술을 중국과 연결하며 다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오영민 교수. 그의 다음 장면이 강의실일지, 미술관일지, 혹은 작은 종이 위의 첫 붓질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지금도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오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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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중국미술사를 전공해 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인문학원에서 송·원·명·청 회화사를 전공해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중앙미술학원 인문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베이징고궁박물원 고궁학연구소 방문학자, 『예운림예술연구회』 학술고문, 한국미술사학회 회원, 한국 『Seoul Art Guide』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미술학원에서 한국미술사, 세계미술사, 동아시아 문화연구, 한국 시각문화와 물질문화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회화사, 조선시대 회화사, 한중 미술사 교류사이다. 한중 양국에서 현대사진과 뉴미디어 아트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국제 미술전시를 기획했으며, 현재 중국 내 한국문화재 발굴 및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저서


『Upset in Peace—Korean Contemporary Photography』

『명청 화보와 조선후기 화단』


주요 논문 및 연구


『명말청초 판화와 조선후기 회화의 관계 연구』

『‘진경산수’와 ‘남종’의 공존—조선후기 ‘모방’ 실천 속의 권력』

『한국 미술사 현대적 저술이 조선후기 회화 지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진경’ 및 ‘진경시대’ 개념을 중심으로』

『말년 정선과 「퇴우이선생진첩」』

『강희안과 조선시대 ‘절파’ 화풍의 흥기』

『조선후기 화가 이인상의 화풍 형성과 신안화파의 동전(東傳)』

『이미지 속의 현실과 상상—조선시대 연행길의 시공간 표현과 시각적 재현』 외 다수


연락처

fineart1107@126.com


글·인터뷰 박효진  |  아트인코리아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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