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기록] 지오최 작가 @ji_oh_choi
아트인코리아
승인 2026.10.08 08:54
[취향의 기록] 지오최 작가
@ji_oh_choi
지오최 개인전
《My Topophilia : 찬란한 순간의 기억》
2026. 10. 6 ~ 10. 31
갤러리 발트 청담
@gallery_wald
<전시감상 요약문>
전시감상 - 지오최(b.1966)
토포필리아, 장소를 사랑한다는 것
이 상 민 | 미술인문 작가,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장
넉 달 전 운중화랑에서 추니박 작가와 〈두 개의 숨〉을 내쉬었던 지오최 작가가, 이번에는 홀로 청담동에 정원 하나를 펼쳐놓았습니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는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정립한 '장소사랑'의 개념입니다. 공간이 텅 빈 좌표라면, 장소는 기억과 감정이 머물러 이름을 얻은 곳이지요. 작가는 말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기억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카이로스의 순간들을 화면 위에 불러낸다." 이번 전시는 그 찰나가 꽃으로, 열매로, 작은 생명으로 다시 피어난 기록입니다.
배추 한 포기의 형이상학
가장 오래 발길을 붙든 것은 검은 화면 위에 누운 세 포기의 배추, 〈살아지고, 사라지고〉 연작이었습니다. '살아지고'와 '사라지고'는 똑같이 [사라지고]로 발음됩니다. 소리는 하나인데 뜻은 정반대지요. 삶이 견뎌지고 이어진다는 뜻과, 무엇인가 자취를 감춘다는 뜻.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사라져 갑니다.
가까이 보면 그 이중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잎 끝은 갈색으로 시들어 가는데, 잘려나간 밑동에서는 새 덩굴이 뻗어 꽃을 피웁니다. 노자가 말한 "만물이 저마다 그 뿌리로 돌아간다(各復歸其根)"의 순간입니다. 끝에서 시작이 돋고, 사라짐 속에서 삶이 살아집니다.
숨은 자화상들
지오최의 그림은 두 번 봐야 합니다. 멀리서 한 번, 아주 가까이서 한 번.
· 거북이: 30년 넘게 붓을 놓지 않은 화업의 걸음
· 올빼미: 황혼에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그리고 서로를 의식하며 그림 그리는 두 작가
· 나비·애벌레·박쥐: 꿈과 현실의 경계, 변신, 복(福)
· 붉은 실과 편지: 월하노인의 인연, 전하지 못한 편지와 끝내 맺어진 매듭
· 계란프라이: 다섯 살 작가가 꽃으로 보았던, 어머니의 모성
"태어나는 것, 태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던 2011년의 질문이 15년 만에 이 제목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손톱만 한 집과 배와 거북이 거대한 세계를 엽니다.
리본은 문이 되고, 열매는 우주가 되다
2022년 "나 자신이 된" 리본은 이번 〈I am the Ribbon〉 연작에서 두 기둥이 맞닿은 아치, 곧 문이 됩니다. 연꽃 기둥 속에는 눈물 맺힌 눈이 세상을 응시하고, 붉은 아치 아래로는 기억을 실은 작은 배가 떠 있습니다.
〈Pink Heart〉의 청포도 송이는 마그리트식 스케일의 전복이지만, 포도알 하나하나는 창문과 집과 거북이를 품은 행성입니다. 〈심연에 핀 붉은 꽃〉의 복숭아나무는 무릉도원이 심연 위에 피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개와 스와로브스키, 영원의 빛과 찰나의 빛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재료입니다. 자개는 상처를 감싸며 수십 년 쌓인 진주층, 곧 상처가 빛이 된 물질이며 괴석에 영원을 새깁니다. 스와로브스키는 꽃잎과 리본 위에서 걸음마다 생겼다 사라지는 카이로스의 빛입니다. 한국 전통공예와 현대 크리스털이 충돌이 아닌 융합으로 만납니다.
평범했던 순간은 이미 찬란했다
지오최의 초현실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히 보는 렌즈입니다. 계란프라이가 꽃으로, 포도알이 행성으로, 배추가 생과 사의 우주로 보이는 순간, 우리는 익숙한 것들이 품은 생명을 다시 발견합니다.
작가노트는 이렇게 끝납니다. "평범했던 순간은 이미 그 자체로 찬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오최(b.1966)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국내외 19회 개인전과 100여 회 단체전에 참여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삼성전자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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