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이성민(b.2000) 스캐너가 읽지 못한 것들
이성민(b.2000) (홍익대학교 조소전공 학사 /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 재학)
〈chasing〉 2026, 캔버스에 아크릴, 53×33.4cm
— 스캐너가 읽지 못한 것들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06
은회색 화면 가득 자동차의 형체가 겹쳐 있다. 보닛의 곡면, 바퀴의 림, 사이드미러의 각도가 분명히 자동차인데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다. 형태는 서로를 파고들고, 가장자리는 녹아내리듯 흐려지며, 색은 거의 다 빠져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찍은 사진 같기도 하고, 연산이 덜 끝난 화면 같기도 하다. 후자가 정답에 더 가깝다.
작가는 자기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직접 제작한 조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3D 스캔과 디지털 왜곡을 거쳐 다시 회화로 옮겨 오는 매체 순환을 실험한다고. 조각에서 데이터로, 데이터에서 회화로. 홍익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회화로 옮겨 온 이 작가의 이력이 그대로 작업의 방법론이 되어 있다. 전공을 바꾼 것이 아니라 두 전공 사이의 이동 자체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3D 스캔의 성질을 짚어야 이 화면이 제대로 읽힌다. 스캐너는 빛을 쏘고 되돌아오는 것을 재서 형태를 계산한다. 그래서 빛을 곧게 되돌려 주지 않는 표면은 잘 읽지 못한다. 반사가 강한 금속, 광택 도장, 유리는 스캐너가 가장 못 다루는 대상이다. 빛이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나가 데이터에 구멍이 생기고, 소프트웨어는 그 구멍을 짐작으로 메운다. 자동차야말로 그 조건의 총합이다. 이 화면의 뭉개진 형태들은 화가가 흐리게 그린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읽지 못한 자리가 그대로 남은 것이다.
매체를 옮길 때마다 정보는 줄어든다. 조각을 스캔하면 표면의 미세한 손자국이 사라지고, 데이터를 왜곡하면 구조가 흔들리며, 그것을 다시 손으로 그리면 또 한 겹의 해석이 얹힌다. 복사의 복사를 거듭할수록 원본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매체 이론에서는 세대 손실이라 부른다. 대개는 피해야 할 결함이다. 이성민은 그 손실을 회화의 내용으로 삼는다. 무엇이 남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빠져나갔는가를 그리는 것이다.
색을 점차 덜어 낸다는 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회화사에는 그리자유(grisaille)라는 기법이 있다. 회색 계조만으로 그려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인데, 애초에 이 기법이 생긴 이유가 회화가 조각을 흉내 내기 위해서였다. 색을 버려야 형태와 부피가 또렷해진다는 것을 옛 화가들도 알고 있었다. 조각을 전공한 사람이 회화로 건너와 색을 덜어 내며 구조에 집중한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리자유의 논리를 다시 밟고 있는 셈이다.
제목 'chasing'도 두 겹으로 읽힌다. 첫 번째는 추격이다. 자동차가 자동차를 쫓는 장면, 혹은 사라지는 형태를 붙잡으려는 화가의 태도. 두 번째는 금속공예 용어다. 정으로 금속 표면을 두드려 무늬를 새기는 그 기법의 이름이 체이싱이다. 조소를 공부한 사람에게 이 단어가 어느 쪽으로 먼저 다가왔을지 궁금해진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자동차가 소재라는 점도 미술사적으로 흥미롭다. 20세기 초 미래주의자들은 포효하는 자동차가 고대의 승리의 여신상보다 아름답다고 선언했다. 속도가 새로운 미의 기준이 되던 시대의 선언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이성민의 자동차는 포효하지 않는다. 색을 잃고, 형태가 뭉개지고, 스캔 오류에 갇혀 있다. 속도의 상징이 데이터 처리의 한계 앞에서 멈춰 선 이 장면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사물을 만나는 방식의 정직한 초상이다.
컬렉터에게 무채색 회화는 다루기 좋은 자산이다. 어떤 벽지, 어떤 가구와도 충돌하지 않고 다른 작품의 색을 죽이지도 않는다. 색이 강한 작품을 여러 점 가진 분들에게는 특히 권할 만하다. 다만 이 그림은 가까이서 봐야 한다. 멀리서는 흐린 자동차 그림이지만, 한 걸음 다가서면 형태가 무너져 내리는 그 경계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