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원다예(b.1999) 밤이 길어져야 피는 꽃
원다예(b.1999) (경희대 대학원 25학번 한국화)
〈월하〉 2024, 한지에 채색, 90×82cm
— 밤이 길어져야 피는 꽃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28
화면 가득 국화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수백 장의 꽃잎이 중심에서 뻗어 나가며 화면 밖으로 밀려 나갈 듯 부풀어 있고, 회청색 배경 위쪽으로는 달이 반쯤 걸려 있다. 그리고 꽃 한가운데, 꽃잎에 파묻힌 자리에 흰 토끼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처음에는 꽃만 보이다가 뒤늦게 토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발견의 순서가 이 그림이 설계한 경험이다.
제목 〈월하〉와 토끼, 그리고 국화. 이 세 요소는 동아시아가 천 년 넘게 공유해 온 상징의 삼각형이다. 달에는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는 중국과 한국, 일본이 함께 나눠 온 신화다. 달 표면의 어두운 무늬를 토끼로 읽는 것은 사실 문화적 약속이지 자연의 사실이 아니다. 서양 사람들은 같은 무늬에서 사람 얼굴을 본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읽는 이 차이가 곧 문화이고, 원다예는 그 오래된 읽기 방식 위에 자기 화면을 세운다.
국화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자. 사군자 가운데 국화는 늦가을 서리를 견디고 홀로 피어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 되었고,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꺾어 들던 장면 이래 은자의 꽃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식물학은 이 상징에 놀라운 근거를 더해 준다. 국화는 단일식물이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야 비로소 꽃눈을 만든다. 어둠의 길이가 개화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화가 늦가을에 피는 것은 추위를 이겨서가 아니라 긴 밤을 기다려서다. 〈월하〉라는 제목이 여기서 뜻밖의 정확성을 얻는다. 이 꽃은 정말로 달 아래에서 피어난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현대 문인화라고 부른다. 먹과 단순한 채색으로 그리던 문인화에 진한 농도의 채색과 팝아트적 요소를 융합했다는 설명이다. 나는 이 결합이 겉보기보다 자연스럽다고 본다. 동양 채색화의 전통 기법인 구륵전채(鉤勒塡彩)는 먼저 윤곽선을 또렷하게 긋고 그 안을 색으로 메우는 방식인데, 이것은 팝아트의 아웃라인 처리와 형식적으로 거의 같다. 평면적으로 채워진 색과 명료한 윤곽선. 천 년의 공필화와 20세기 팝아트가 같은 문법을 쓰고 있었던 셈이다. 이 화면이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지금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꽃잎의 처리를 자세히 보면 이 작가의 공력이 드러난다. 수백 장의 꽃잎이 저마다 다른 각도로 휘어 있고, 안쪽으로 갈수록 색이 조금씩 짙어지며, 끝부분은 미세하게 말려 있다. 한 장씩 그려 넣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화면이다. 90×82cm의 크기를 이 밀도로 채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젊은 작가가 이만한 인내를 화면에 쏟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정보다.
꽃 속에 토끼를 숨긴 구성도 다시 보게 된다. 토끼는 지키는 동물이 아니라 숨는 동물이다. 굴을 파고, 몸을 낮추고, 위험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의 한복판에 가장 겁 많은 동물을 앉혀 놓은 것이다. 강함의 상징 안에 연약함을 품게 하는 이 배치를 나는 이 그림의 가장 좋은 대목으로 꼽고 싶다. 작가가 꽃의 의미가 뻗어 나가 우리 모두를 비추고 아울러 품고 있기를 바란다고 쓴 문장의 '품는다'가 여기서 형상을 얻는다.
현대 문인화라는 이름을 내걸 때 가장 흔한 실패는 옛것을 흉내 내는 데서 멈추는 것이다. 원다예는 그 함정을 피했다. 그는 상징을 인용하되 그 상징에 새로운 온도를 넣었다. 고고함을 말하면서 귀여움을 함께 놓았고, 절개를 말하면서 은신을 함께 놓았다. 전통은 그대로 되풀이할 때가 아니라 이렇게 어긋나게 겹칠 때 살아난다.
컬렉터에게 이 그림은 정면성이 강한 작품이다. 화면 한가운데에 대상이 크게 놓여 있어 시선을 정중앙으로 끌어당기고, 그래서 좁은 벽보다 넉넉한 벽에 홀로 걸어야 힘이 산다. 90×82cm에 가까운 정방형에 가까운 비례라 다른 그림들과 나란히 걸기는 쉽지 않지만, 반대로 현관이나 계단참처럼 한 점만 걸리는 자리에서는 더없이 좋다. 채색화는 시간이 지나며 색이 차분해지는데, 이 그림은 그때가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