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안지예(b.1988) - 휘어 버린 격자, 물러진 모더니즘
안지예(b.1988)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석사)
〈Flexible〉 2025, 캔버스에 유채, 40.9×31.8cm
— 휘어 버린 격자, 물러진 모더니즘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45
연한 민트빛 바탕 위에 짙푸른 창문들이 줄지어 있다. 그런데 그 줄이 곧지 않다. 아래로 갈수록 완만하게 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간격이 벌어졌다 좁아진다. 도시의 유리 외벽에 맞은편 건물이 비친 장면이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면서도 좀처럼 멈춰 서지 않는 그 광경을, 안지예는 캔버스로 옮겨 왔다.
먼저 격자에 대해 말해야겠다. 미술사에서 격자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그리드(grid)야말로 모더니즘 회화의 상징이라고 했다.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위계도 중심도 없으며, 화면 밖으로 무한히 이어질 수 있는 형식. 몬드리안과 아그네스 마틴이 평생을 바친 그 곧은 선들은 회화가 자기 자신 외에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안지예의 화면은 바로 그 형식을 가져오되 물러지게 만든다. 가장 견고했던 형식이 유리 한 장을 거치며 흐물거린다.
흥미로운 점은 이 휘어짐이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사실이다. 건물 외벽의 대형 유리는 완전히 평평하지 않다. 강화 처리 과정에서 롤러 자국이 남아 미세한 물결이 생기고, 밀폐된 복층 유리는 기압과 온도 차에 따라 판 자체가 오목해지거나 볼록해진다. 그래서 도시의 커튼월에 비친 격자는 언제나 조금씩 출렁인다. 건축의 관점에서 이것은 결함이고 시공 오차다. 안지예는 그 오차를 회화의 주제로 승격시켰다. 결함이 아름다움이 되는 지점을 알아보는 눈, 그것이 화가의 눈이다.
반사라는 현상 자체도 생각해볼 만하다. 유리 건물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맞은편을 비춘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이래 커튼월 건축이 도시를 채우면서, 건물은 자기 얼굴을 지우고 이웃의 얼굴을 대신 걸어 두는 존재가 되었다. 안지예의 2018년 개인전 제목이 《Reflect; The other》였다는 사실은 그가 이 구조를 오래 들여다봤음을 알려 준다. 비친다는 것은 나를 지우고 남을 담는 일이다.
작가는 이 곡선이 특정 사건이나 대상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여 준다고 썼다. 실제로 이 화면에는 어떤 사건도 없다. 인물도, 서사도, 시간의 표지도 없다. 다만 반복되는 창문들이 조금씩 어긋나며 흔들릴 뿐이다. 그런데 그 미세한 어긋남이 화면 전체에 리듬을 만든다. 완전히 똑같은 반복은 정지로 읽히고,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반복만이 움직임으로 읽힌다. 음악에서 루바토(Rubato)가 그러하듯이.
2025년 개인전 《Alive_In The City》라는 제목을 여기에 겹쳐 본다. 도시에서 살아 있다는 것. 도시는 격자로 지어졌지만 그 안의 삶은 격자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계획된 구획과 실제로 살아가는 리듬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 유리에 비친 창문의 흔들림으로 나타난다면 이보다 적절한 은유를 찾기 어렵다.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방식과 태도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작가의 문장이 여기서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컬렉터에게 이런 작품은 여러 점을 함께 걸 때 힘이 커진다. 반복 구조를 가진 회화는 한 점만 걸면 조용하지만, 두세 점을 나란히 걸면 화면과 화면 사이에도 리듬이 생긴다. 40.9×31.8cm의 6호 남짓한 크기는 그렇게 묶어 걸기에 알맞다. 색도 밝고 채도가 낮아 어느 공간에나 무리 없이 들어가되,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창문 하나하나가 다르게 그려졌음이 보인다. 멀리서는 패턴이고 가까이서는 회화인 그림, 나는 그런 이중성을 좋아한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