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이상열(b.1997) 마원의 한 귀퉁이를 오늘의 살빛으로
이상열(b.1997) (경희대 대학원 25학번 한국화)
〈무제〉 2026, 한지에 유채, 45.5×53cm
— 마원의 한 귀퉁이를 오늘의 살빛으로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09 | 최종 수정 2026.08.30 23:10
둥근 바위 무더기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줄기는 몇 번 몸을 틀며 위로 뻗고, 가지는 오른쪽으로 넓게 퍼져 짙은 초록의 솔잎을 이고 있다. 배경의 구름은 회백색으로 소용돌이치며 화면 왼쪽을 채우고, 그 사이로 옅은 하늘이 비친다. 바위의 색이 특이하다. 회색이나 갈색이 아니라 살구빛에 가까운 따뜻한 살색이다. 돌이라기보다 살결 같고, 그래서 이 풍경 전체가 어딘가 몽롱하다.
작가는 이 작품이 마원(馬遠)의 채색 산수도를 보고 그 구도와 분위기를 자기 감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밝힌다. 마원은 남송 화원의 대표적 화가로, 화면의 한쪽 귀퉁이만 그리고 나머지를 비워 두는 구도 때문에 '마일각(馬一角)', 곧 마씨의 한 모퉁이라 불렸다. 이상열이 비대칭 구도와 여백을 활용했다고 쓴 것은 바로 그 변각 구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이 화면에서 소나무와 바위는 오른쪽 아래에 몰려 있고 왼쪽 위는 구름에 내주었다.
마원의 구도가 그런 형태를 갖게 된 배경에는 역사가 있다. 남송은 북방을 잃고 강남으로 밀려난 왕조였고, 그 시대의 산수를 후대는 '잔산잉수(殘山剩水)', 남은 산과 남은 물이라 불렀다. 온전한 천하를 그릴 수 없게 된 자들이 한 귀퉁이만을 그렸던 것이다. 여백이 미학이기 이전에 상실의 흔적이었다는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젊은 화가가 팔백 년 전의 구도를 빌려 온 일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가 무엇을 비워 두었는지가 궁금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상열이 마원에게서 구도는 가져오되 필법은 정반대로 갔다는 점이다. 마원의 바위는 부벽준(斧劈皴)으로 그려진다. 도끼로 쪼갠 듯 각지고 날카로운 면으로 암석의 단단함을 드러내는 준법이다. 그런데 이 화면의 바위에는 각이 없다. 모두 둥글고 부풀어 있으며, 경계는 부드럽게 이어진다. 남송 화원의 강한 필세를 걷어 낸 자리에 말랑한 덩어리감이 들어선 것이다. 원작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개인적인 시선으로 변형했다는 작가의 말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 변형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오늘의 이미지 환경일 것이다. 매끄럽게 렌더링된 표면, 경계가 부드럽게 처리된 볼륨, 채도가 낮고 온도가 높은 색. 우리가 화면에서 매일 만나는 삼차원 이미지의 문법이 이 바위들에 스며 있다.
재료에 대해서도 짚어야겠다. 한지에 유채다. 한국화를 전공하는 학생이 한지를 쓰되 물감은 유화를 쓴 것이다. 이 조합은 다루기 까다롭다. 유화의 기름은 종이에 스며들어 번져 나가고, 시간이 지나면 종이를 산화시켜 갈변을 일으킨다. 그래서 보통은 바탕에 아교나 젯소로 막을 만들어 기름이 종이에 직접 닿지 않게 한다. 이 화면의 색이 탁해지지 않고 균질하게 얹혀 있다는 것은 그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재료를 섞을 때 중요한 것은 대담함이 아니라 각 재료의 성질을 아는 일이다.
제목이 〈무제〉인 점도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마원을 참조했다고 밝히면서도 제목으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옛 산수화는 언제나 제목을 가졌고, 그 제목이 그림을 읽는 열쇠였다. 이상열은 그 열쇠를 주지 않는다. 참조는 밝히되 해석은 열어 두는 것, 개인전 제목이 《poetic fantasy》였다는 사실과도 통하는 태도다. 시적인 것은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시가 된다.
컬렉터에게 45.5×53cm는 아주 다루기 좋은 크기다. 10호 정도의 화면은 서재나 침실, 복도 어디에든 들어가고 다른 작품과 함께 걸기에도 무리가 없다. 다만 한지에 유채라는 조합은 보존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니, 뒷면이 통기되는 액자를 쓰고 습한 벽은 피하는 편이 좋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옛 산수와 함께 걸 때 재미있어진다. 오래된 족자 곁에 이 살빛 바위를 놓아 보면, 팔백 년의 거리가 한 벽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