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유진 - 부딪히면 깨지는 것들로 만든 영구운동
김유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14학번 전통회화, 한성대 대학원 동양화(진채화) 석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회화 박사 수료)
〈흐르다2(flow2)〉 2025, 비단에 채색, 50×75cm
— 부딪히면 깨지는 것들로 만든 영구운동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31
살구빛 비단 위에 하얀 찻잔 여섯이 실에 매달려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 끝의 한 잔이 홀로 밖으로 튕겨 나가 허공에 떠 있다. 이 배치를 보는 순간 나는 웃고 말았다. 뉴턴의 요람이다. 책상 위 장식품으로 흔히 보는 그 쇠구슬 장치, 한쪽 끝을 들었다 놓으면 반대쪽 끝이 튀어 오르는 운동량 보존의 시범 장치. 김유진은 그 쇠구슬 자리에 찻잔을 걸었다.
이 치환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뉴턴의 요람이 성립하려면 구슬은 단단하고 탄성이 커야 한다. 그런데 찻잔은 부딪히면 깨진다. 작가는 충돌을 전제로 하는 장치에 충돌을 견딜 수 없는 사물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니 이 그림 속 운동은 영원히 계속될 수도, 단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아직 부딪히지 않은 순간, 튕겨 나간 잔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그 찰나에 화면이 멈춰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오래 '水' 연작을 이어 왔다. 찻자리와 물의 순환을 통해 인간 내면의 사유가 도는 방식을 그린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두 개의 보존 법칙이 만난다. 하나는 물리의 보존이다. 뉴턴의 요람은 에너지와 운동량이 사라지지 않고 옮겨 다닌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하나는 지구의 물순환이다. 비가 되고 강이 되고 수증기가 되어 돌지만 지구 위 물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찻잔 하나에 담긴 물도 그 거대한 순환이 잠시 머무는 자리다.
작가가 자기 작업을 설명하며 쓴 표현이 정확히 그렇다. 한 잔의 차는 끝없이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흐름과 머묾은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몸이다. 강이 흐르기 때문에 여울이 생기고, 여울은 흐름이 잠시 붙잡히는 장소다. 개인전 제목이 《水_들어서다》(2019), 《水_흐르다》(2022), 《水_머무르다》(2025)로 이어져 온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숫자의 배열도 읽어 볼 만하다. 여섯이 붙어 있고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있다. 다수와 예외의 구도다. 뉴턴의 요람에서 튕겨 나간 구슬은 이탈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전체가 전달한 힘을 혼자 받아 낸 것이다. 무리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하나가 실은 무리의 결과라는 이 구조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조용한 도해처럼도 읽힌다. 게다가 찻잔마다 그려진 작은 꽃과 잎은 전통 화조(花鳥)의 축소판이어서, 그림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이 들어앉아 있다.
매달린 사물은 진자다. 그리고 진자는 인류가 시간을 처음으로 정확히 잰 도구였다. 호이겐스가 진자시계를 만든 이래 인간은 흔들림의 규칙성으로 하루를 나눠 왔다. 차를 우리는 일 역시 시간을 재는 행위다. 몇 분을 기다리느냐가 맛을 결정한다. 그러니 이 화면에는 시간을 재는 두 방식이 겹쳐 있는 셈이다. 물리의 시간과 다도의 시간. 다도가 말하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지금 이 자리는 두 번 오지 않는다는 감각이 진자의 반복 위에 얹힌다.
재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비단에 채색, 즉 견본채색은 전통회화가 가장 공들여 지켜 온 기법이다. 비단은 종이와 달리 물감을 앞뒤로 여러 겹 올려야 색이 깊어지고, 잘못 올리면 되돌릴 수 없다. 그 느린 재료로 물리 실험 장치를 그렸다는 점이 이 작업의 통섭적 매력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생의 찬미》 같은 채색화 특별전에 참여한 이력이 말해 주듯, 그는 전통을 지키는 쪽이 아니라 전통의 문법으로 오늘을 발음하는 쪽에 서 있다.
컬렉터에게 이 그림의 미덕은 정지의 힘이다. 소장자는 매일 이 화면 앞을 지나며 아직 부딪히지 않은 순간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그림, 그런 그림은 쉽게 물리지 않는다. 게다가 찻잔이라는 소재는 어느 공간에도 낯설지 않다. 서재에도, 다실에도, 식탁 위 벽에도 자연스럽게 놓인다. 조용하지만 매일 말을 거는 그림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