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유진 - 부딪히면 깨지는 것들로 만든 영구운동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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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기록 (3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유진 - 부딪히면 깨지는 것들로 만든 영구운동    네이버 구글

김유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14학번 전통회화, 한성대 대학원 동양화(진채화) 석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회화 박사 수료) 〈흐르다2(flow2)〉 2025, 비단에 채색, 50×75cm — 부딪히면 깨지는 것들로 만든 영구운동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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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다2(flow2) 2025, 비단에 채색, 50×75cm

 

살구빛 비단 위에 하얀 찻잔 여섯이 실에 매달려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 끝의 한 잔이 홀로 밖으로 튕겨 나가 허공에 떠 있다. 이 배치를 보는 순간 나는 웃고 말았다. 뉴턴의 요람이다. 책상 위 장식품으로 흔히 보는 그 쇠구슬 장치, 한쪽 끝을 들었다 놓으면 반대쪽 끝이 튀어 오르는 운동량 보존의 시범 장치. 김유진은 그 쇠구슬 자리에 찻잔을 걸었다.

이 치환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뉴턴의 요람이 성립하려면 구슬은 단단하고 탄성이 커야 한다. 그런데 찻잔은 부딪히면 깨진다. 작가는 충돌을 전제로 하는 장치에 충돌을 견딜 수 없는 사물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니 이 그림 속 운동은 영원히 계속될 수도, 단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아직 부딪히지 않은 순간, 튕겨 나간 잔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그 찰나에 화면이 멈춰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오래 '水' 연작을 이어 왔다. 찻자리와 물의 순환을 통해 인간 내면의 사유가 도는 방식을 그린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두 개의 보존 법칙이 만난다. 하나는 물리의 보존이다. 뉴턴의 요람은 에너지와 운동량이 사라지지 않고 옮겨 다닌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하나는 지구의 물순환이다. 비가 되고 강이 되고 수증기가 되어 돌지만 지구 위 물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찻잔 하나에 담긴 물도 그 거대한 순환이 잠시 머무는 자리다.

작가가 자기 작업을 설명하며 쓴 표현이 정확히 그렇다. 한 잔의 차는 끝없이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흐름과 머묾은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몸이다. 강이 흐르기 때문에 여울이 생기고, 여울은 흐름이 잠시 붙잡히는 장소다. 개인전 제목이 《水_들어서다》(2019), 《水_흐르다》(2022), 《水_머무르다》(2025)로 이어져 온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숫자의 배열도 읽어 볼 만하다. 여섯이 붙어 있고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있다. 다수와 예외의 구도다. 뉴턴의 요람에서 튕겨 나간 구슬은 이탈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전체가 전달한 힘을 혼자 받아 낸 것이다. 무리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하나가 실은 무리의 결과라는 이 구조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조용한 도해처럼도 읽힌다. 게다가 찻잔마다 그려진 작은 꽃과 잎은 전통 화조(花鳥)의 축소판이어서, 그림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이 들어앉아 있다.

매달린 사물은 진자다. 그리고 진자는 인류가 시간을 처음으로 정확히 잰 도구였다. 호이겐스가 진자시계를 만든 이래 인간은 흔들림의 규칙성으로 하루를 나눠 왔다. 차를 우리는 일 역시 시간을 재는 행위다. 몇 분을 기다리느냐가 맛을 결정한다. 그러니 이 화면에는 시간을 재는 두 방식이 겹쳐 있는 셈이다. 물리의 시간과 다도의 시간. 다도가 말하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지금 이 자리는 두 번 오지 않는다는 감각이 진자의 반복 위에 얹힌다.

재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비단에 채색, 즉 견본채색은 전통회화가 가장 공들여 지켜 온 기법이다. 비단은 종이와 달리 물감을 앞뒤로 여러 겹 올려야 색이 깊어지고, 잘못 올리면 되돌릴 수 없다. 그 느린 재료로 물리 실험 장치를 그렸다는 점이 이 작업의 통섭적 매력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생의 찬미》 같은 채색화 특별전에 참여한 이력이 말해 주듯, 그는 전통을 지키는 쪽이 아니라 전통의 문법으로 오늘을 발음하는 쪽에 서 있다.

컬렉터에게 이 그림의 미덕은 정지의 힘이다. 소장자는 매일 이 화면 앞을 지나며 아직 부딪히지 않은 순간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그림, 그런 그림은 쉽게 물리지 않는다. 게다가 찻잔이라는 소재는 어느 공간에도 낯설지 않다. 서재에도, 다실에도, 식탁 위 벽에도 자연스럽게 놓인다. 조용하지만 매일 말을 거는 그림이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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