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신종민(b.1994년) - 무거운 재료로 지은 가상의 텅 빔
신종민(b.1994년) (경희대 대학원 22학번 조소)
〈무제〉 2025-2026, 철·시멘트·자석·실크·아크릴 채색, 가변크기
— 무거운 재료로 지은 가상의 텅 빔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49
바닥에 놓인 형태를 처음 보면 무엇이라 부를지 난감하다. 짙은 초록의 별 모양 받침 위에 분홍빛 다면체가 얹혀 있고, 그 표면에는 눈과 입술 같은 이미지가 흩어져 있다. 꽃 같기도 하고 광대의 모자 같기도 하며, 게임에서 방금 튀어나온 오브젝트 같기도 하다. 좌대가 없어 관객과 같은 바닥에 앉아 있는데, 그 무례에 가까운 친근함이 이 조각의 첫 인상을 결정한다.
작가의 노트가 이 형태의 출처를 밝힌다. 철골조와 시멘트라는 무거운 재료를 쓰면서도 내부를 비워 두는 구조, 그것이 3D 그래픽의 와이어프레임과 로우폴리곤 원리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생각보다 깊다. 3D 모델은 원래 속이 없다. 화면 속 사과를 반으로 가르면 과육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나온다. 껍데기만 있는 것이 가상 세계의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신종민은 그 없음을 시멘트와 철로 지어 올린다. 가장 무거운 재료로 가장 가벼운 원리를 실물화하는 것이다.
로우폴리곤이라는 말도 생각해볼 만하다. 초기 3차원 그래픽은 연산 능력의 한계 때문에 곡면을 최소한의 삼각형으로 근사할 수밖에 없었다. 폴리곤 하나하나가 곧 비용이었다. 둥글어야 할 것이 각지게 보이던 그 시절의 결핍이 지금은 하나의 미학으로 되살아났다. 부족해서 생긴 형태가 시간이 지나 양식이 된 것이다. 이 조각의 각진 면들은 그러니 단순화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시각 기억을 불러오는 장치다.
재료 목록에 자석이 들어 있다는 점이 나는 가장 흥미로웠다. 조각에서 접합은 대개 용접이나 볼트로 이루어진다. 한 번 붙이면 되돌리기 어렵고, 그 되돌릴 수 없음이 조각에 견고함을 준다. 그런데 자석은 다르다. 접촉면을 붙들되 언제든 뗄 수 있고, 붙는 자리도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작가가 해체와 조합의 반복을 말하는 근거가 여기 있다. 가변크기라는 표기도 그래서 형식적 표현이 아니라 작동 원리의 선언일 것이다. 이 조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형태로 조립되어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자석은 또한 접촉 없이 작용하는 힘이다.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결합을 만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場)이다. 느슨하지만 분명한 결속. 이 원리를 관계의 은유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작가가 기성 세계의 구조를 교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생성한다고 쓴 문장에서 '관계'라는 단어는 조형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 양쪽을 겨냥한다.
표면에 실크와 아크릴로 이미지를 입힌 방식도 3차원 그래픽의 문법과 정확히 겹친다. 텍스처 매핑이라 부르는 그 공정은 다각형 껍데기 위에 평면 이미지를 씌워 재질감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실제로는 아무 질감이 없는 면에 사진 한 장을 붙여 살결이나 금속으로 보이게 하는 것. 신종민의 조각 표면에 눈과 입술이 흩어져 있는 이유가 여기서 설명된다. 그것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텍스처다. 껍데기에 붙은 이미지가 내용을 대신하는 세계, 우리가 매일 스크롤하며 지나는 화면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작가가 2024년에 이미 OCI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이력을 나는 눈여겨보았다. 젊은 나이에 신진 작가 지원으로 이름 높은 미술관의 개인전을 치르고,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 연달아 개인전을 이어 간다는 것은 흔한 속도가 아니다. 다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 작가는 매번 다른 형태를 만드는 대신 같은 원리를 다르게 조립하고 있다. 원리를 가진 작가는 오래 간다.
컬렉터에게 가변크기 조각은 즐거움이자 숙제다. 자석으로 결합된 작품은 소장자가 구성을 바꿀 수 있지만, 그만큼 재조립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소장할 때 작가에게 설치 사진과 조립 순서를 문서로 받아 두기를 권한다. 지금 미술 시장에서 가변 설치 작품의 가치는 그 문서의 유무로 갈린다. 형태가 유동적인 작품일수록 기록이 곧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이 젊은 조각가의 작업이 앞당겨 보여 준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