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송리(b.1994) - 없는 산을 진짜로 그리는 법
김송리(b.1994) (숙명여자대학교 17학번 회화)
〈Sangsangsan〉 2026, 캔버스에 유채, 43.2×50cm
— 없는 산을 진짜로 그리는 법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41
화면이 삼각형이다. 그리고 그 삼각형 안에 산이 그려져 있다. 바위 봉우리들이 층층이 겹치고, 꼭짓점 부근의 하늘은 노랑에서 주황, 다시 초록으로 번진다. 일출인지 일몰인지 작가는 정해 주지 않는다. 지지체의 모양이 곧 그리는 대상의 모양인 그림, 회화에서 이런 일치는 생각보다 드물다. 프랭크 스텔라 이후 부정형 화면은 대개 추상으로 갔지, 풍경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각형이 산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한자 '山'을 떠올리게 된다. 상형문자란 결국 사물의 윤곽을 문자의 몸으로 삼은 것이다. 김송리의 화면은 회화가 상형의 단계로 되돌아간 사례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목 'Sangsangsan'을 로마자로 적어 놓음으로써 이 상형은 한 번 더 낯설어진다. 상상산(想像山)인지, 상상(想像)의 산인지, 아니면 그저 산·산·산이 세 번 반복되는 소리인지 결정되지 않는다. 결정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이 작가의 방식이다.
작가는 최근 작업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실재하는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너머'를 표현했다면,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산 자체를 먼저 생성한 뒤 화면에 옮긴다고. 그런데 2025년 여름, 그가 개인전 《너머의 겹》을 연 곳이 하필 겸재정선미술관이었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성지에서 존재하지 않는 산을 그린 셈이다. 나는 이 배치가 근사한 역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역설은 화해로 바뀐다. 겸재의 진경도 사실은 사생이 아니었다. 〈인왕제색도〉의 시점은 하나가 아니고, 〈금강전도〉는 실제로는 한자리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겸재는 본 것들을 기억 속에서 겹쳐 하나의 화면으로 합성했다. 즉 진경산수 역시 처음부터 '레이어링'이었다. 김송리가 겹을 쌓아 없는 산을 만들 때, 그는 겸재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겸재의 방법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개인전 제목들을 연도순으로 늘어놓으면 한 사람의 시선이 이동한 궤적이 보인다. 《타인의 방》(2021), 《Beyond the Reality》(2022), 《어떤 이야기》(2022), 《너머의 겹》(2025), 그리고 〈Sangsangsan〉(2026). 방에서 시작해 실재 너머로, 다시 이야기로, 마침내 겹이라는 방법론으로 옮겨 갔다. 대상이 점점 사라지고 방식이 남는다. 젊은 작가가 무엇을 그릴지에서 어떻게 그릴지로 질문을 바꾸는 순간이 있는데, 김송리에게는 그 전환이 이미 지나간 일로 보인다.
재료가 유채라는 점도 짚어 둘 만하다. 산수는 원래 물에 푼 먹의 일이었다. 스미고 번지는 것이 산수의 문법이다. 반면 유화 물감은 스미지 않고 덮는다.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만큼 층이 쌓인다. 겹을 방법으로 삼은 작가에게 이보다 정직한 재료는 없다. 동양의 주제를 서양의 물성으로 옮기는 일은 흔하지만, 주제가 요구하는 시간의 성질까지 계산해 재료를 고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겹'이라는 단어는 두 방향에서 울린다. 하나는 디지털 이미지의 레이어이고, 다른 하나는 지질학의 지층이다. 실제 산은 수억 년 동안 퇴적과 융기가 겹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니 겹을 쌓아 산을 그린다는 것은 산의 외형이 아니라 산의 생성 원리를 그리는 일이 된다. 형상을 베끼는 대신 형상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베끼는 것, 이 차이가 젊은 작가의 성숙을 가늠하는 지점이다.
부정형 화면은 벽을 고른다. 사각의 액자들 사이에 걸면 어색하고, 아무것도 없는 넓은 벽 한복판에 홀로 걸어야 산다. 까다롭다는 뜻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걸리는 순간 그 공간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컬렉션이 열 점을 넘어가면 필요한 것은 한 점 더가 아니라 시선을 세워 줄 축(軸)이다. 나는 이 작은 산이 그 축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본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