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인신영(b.1985) 잊히지 않는 봄꿈이라는 모순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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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기록 (3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인신영(b.1985) 잊히지 않는 봄꿈이라는 모순    네이버 구글

인신영(b.1985) (호주 멜버른 RMIT University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삼삼춘몽 VOL.14〉 2026, acrylic on canvas, 90.9×72.7cm — 잊히지 않는 봄꿈이라는 모순 —
이상민   승인 2026.08.3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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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춘몽 VOL.14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90.9×72.7cm

 

청록빛 하늘을 배경으로 야자나무 줄기가 화면을 세로로 가른다. 그 아래로 몬스테라와 토란의 넓은 잎, 노란 꽃대와 보랏빛 꽃차례, 하얀 종 모양 꽃들이 겹겹이 자리를 잡았다. 줄기 중간에는 노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고, 하늘에서는 꽃잎이 흩날린다. 모든 것이 또렷하고 평평하며 밝다. 그림자가 거의 없어 시간이 정지한 것 같고, 그래서 이 정원은 실제 장소라기보다 기억 속의 장소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삼삼춘몽'. 우리말 '삼삼하다'는 잊히지 않고 눈앞에 자꾸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춘몽은 봄꿈, 곧 덧없이 사라지는 것의 대명사다. 일장춘몽이라 할 때의 그 춘몽이다. 그러니 이 제목은 두 개의 반대말을 붙여 놓은 것이 된다. 사라지는 것인데 잊히지 않는다. 작가가 꿈같은 봄날의 기억에서 시작해 사십 대에 이르러 다시 이어 가는 연작이라고 밝힌 그 시간의 길이가, 제목 안에 이미 접혀 있다.

덧없음을 말하던 옛말을 오래 머무는 것으로 뒤집는 이 태도가 이 작업의 핵심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은 봄꿈을 언제나 허무의 자리에 놓았다. 좋은 시절은 짧고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인신영은 같은 단어를 쓰면서 반대 방향으로 간다. 짧았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하게 남았다고. 실제로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작동한다. 오래 지속된 것보다 짧고 강렬했던 것이 더 또렷하게 남는다.

화면의 양식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한 이력과 곧바로 연결된다. 윤곽이 분명하고, 색이 면으로 놓이며, 요소들이 레이어처럼 앞뒤로 겹친다. 그림자와 원근을 덜어 낸 이 평면성은 회화의 어법이라기보다 그래픽의 어법이다. 그러나 이것을 한계로 볼 이유는 없다. 윌리엄 모리스의 벽지 문양이나 프랑스의 토일 드 주이 같은 장식 예술이 회화와 어깨를 나란히 해 온 역사가 있고, 무엇보다 평면적인 화면은 서사를 밀어내고 인상만 남긴다. 기억을 다루기에 이보다 적합한 형식은 드물다.

열대 식물로 채워진 정원을 그린다는 점에서 앙리 루소가 떠오른다. 루소는 평생 파리를 떠난 적이 없으면서 정글을 그렸다. 식물원과 도감에서 본 잎사귀들을 조합해 존재하지 않는 낙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신영의 정원도 실재하는 특정 장소로 보이지 않는다. 야자와 몬스테라와 스노드롭이 한 화면에 함께 피어 있는 곳은 지구상에 없다. 기억이 만들어 낸 정원이란 원래 이렇게 계절과 위도가 섞인 곳이다.

이 작가의 전시 이력에서 나는 한 가지 대목에 오래 눈이 갔다. 스타필드 하남의 작은미술관, 용인의 실버타운, 서울북부병원.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개인전을 열어 왔다는 것이다. 화이트 큐브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로 그림을 가져간 셈이다. 밝고 또렷하고 친근한 이 화면의 성격은 그 선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통념은 미술계 안에서만 통한다. 병실 복도에서 그림 한 점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다른 기준을 갖게 된다.

제목에 붙은 'VOL.14'라는 표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회차가 아니라 권호를 붙였다. 연작을 시리즈가 아니라 책처럼 세는 방식이다. 열네 권째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뜻이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봄날의 기억에서 시작해 사십 대에 다시 잇는다고 했으니, 이 연작은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는 장부에 가깝다.

컬렉터에게 이런 작품은 실용적인 미덕이 크다. 30호 크기에 색이 밝고 소재가 보편적이어서 거실이나 다이닝, 사무 공간 어디에도 무리 없이 들어간다. 아크릴은 유화보다 표면이 견고해 관리도 수월하다. 다만 청록과 노랑의 채도가 높은 편이니 벽 색이 강한 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흰 벽에 걸어 두면 이 정원이 방 안으로 한 뼘쯤 들어온다. 오래 보아도 피로하지 않은 그림, 그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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