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임동현(b.1999) 금속판 위에 내려앉은 장마
임동현(b.1999) (경희대 대학원 24학번 조소)
〈Cresendo〉 2025, 동판·염색목, 60×10×10cm
— 금속판 위에 내려앉은 장마 —
이상민
승인 2026.08.30 22:53
가늘고 긴 동판이 좌대 위에 떠 있다. 양 끝이 뾰족하고 가운데가 부푼 형태, 잎사귀 같기도 하고 칼날 같기도 한 그것이 얇은 지지대 하나에 의지해 비스듬히 걸려 있다. 표면은 균질하지 않다. 푸른 녹청과 갈색, 검은 얼룩이 뒤섞여 있고, 자세히 보면 무수한 점의 자국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그 점들이 이 작품의 내용 전체다.
작가는 그 타점들이 장마철에 들었던 빗소리에서 왔다고 말한다. 빗방울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소리를 기록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서 출발해 동시다발적이고 반복적으로 경험한 빗소리를 한 장의 악보로 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소리를 금속판 위에 점으로 옮긴다는 이 발상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과학사에 정확한 선례가 있다.
1787년 에른스트 클라드니((Ernst Chladni)는 금속판에 모래를 뿌리고 가장자리를 바이올린 활로 켰다. 그러자 모래가 저절로 움직여 별과 꽃과 격자 모양의 무늬를 만들었다. 진동하지 않는 마디선으로 모래가 몰려간 것이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 도형이 된 그 실험은 음향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지금도 클라드니 도형이라 불린다. 소리를 기록하는 판이 하필 금속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임동현이 택한 재료도 금속판이라는 사실이 겹친다. 금속은 진동을 가장 정직하게 받아 내는 물질이다.
타점을 새기는 기법도 짚어야겠다. 금속 표면을 정과 망치로 두드려 무늬를 내는 조금과 타출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수천 년 이어져 온 공예 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방식이 재료를 깎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속은 그대로 있고, 다만 두들겨 맞은 자리가 눌려 들어가 빛을 다르게 반사한다. 잃는 것 없이 자국만 남기는 방식이다. 빗방울이 수면에 하는 일도 정확히 그렇다. 물은 줄지 않고 파문만 남는다.
제목이 크레셴도라는 것도 형태와 맞물린다. 점점 세게. 악보에서 이 지시어는 옆으로 누운 쐐기 모양의 기호로 표기되는데, 한쪽 끝은 뾰족하고 반대쪽으로 갈수록 벌어진다. 이 조각의 실루엣이 바로 그 형태다. 소리의 세기가 커지는 과정을 그린 기호를 입체로 세워 놓은 것이다.
빗소리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빗방울이 물웅덩이에 떨어질 때 우리가 듣는 소리는 물이 부딪히는 충돌음이 아니다. 방울이 수면을 뚫고 들어가면서 작은 공기방울이 물속에 갇히는데, 그 갇힌 공기가 진동하며 내는 소리가 우리 귀에 닿는 것이다. 즉 빗소리는 물의 소리가 아니라 공기의 소리다. 소리를 낸 것은 사라지고 갇힌 것만 울린다. 동판에 남은 타점들이 빗방울 자체가 아니라 빗방울이 지나간 자리라는 사실과 이 이야기는 잘 어울린다.
동이라는 재료의 시간성도 이 작업의 일부다. 구리는 공기와 만나 서서히 산화하고, 그 과정에서 붉은 갈색을 거쳐 푸른 녹청에 이른다. 지금 이 표면의 얼룩덜룩한 색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 중인 상태다. 소장자가 이 작품을 가진 동안 색은 계속 변할 것이고, 타점들의 명도 대비도 달라질 것이다. 소리를 기록한 판이 시간에 따라 다시 쓰이는 셈이다.
컬렉터에게 60×10×10cm의 이 조각은 아주 다루기 좋은 크기다. 좁은 좌대나 선반 위에 세울 수 있고, 위로 긴 비례라 공간을 적게 쓰면서 존재감을 낸다. 다만 동판 작품은 표면 관리가 관건이다. 맨손으로 만지면 지문의 유분이 산화를 국소적으로 가속시키니 장갑을 쓰는 편이 좋고, 작가에게 현재의 파티나를 유지할 것인지 자연스러운 변화를 둘 것인지 확인해 두면 좋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 작품은 소장자와 함께 계속 늙어 가는 종류의 조각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