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민범(김민범)(b.1996) - 아직 조립되지 않은 시간
민범(김민범)(b.1996) (경희대 대학원 24학번 한국화)
〈해적선 parts 15-18〉 2026, 장지에 먹, 각 29.7×21cm
— 아직 조립되지 않은 시간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47
먹으로 그린 설계도 같다. 첫인상은 그렇다. 화면 가득 층층이 쌓인 구조물, 원형 계기판, 그리고 45, 21, 8 같은 숫자들이 무심히 적혀 있다. 수묵이라기엔 너무 기계적이고, 도면이라기엔 너무 손맛이 많다. 이 어긋남 속에 민범의 좌표가 있다. 그는 한국화 전공자이면서 붓을 산수(山水)가 아니라 부품(parts) 쪽으로 돌려세웠다.
발상의 출처는 프라모델의 런너다. 플라스틱 모형을 사면 부품들이 아직 프레임에 붙어 있는 상태로 배달된다. 그 상태의 이름이 런너이고, 조립은 그것을 하나씩 떼어 내면서 시작된다. 민범은 자신의 수묵 드로잉과 일지, 수기를 바로 그 '떼어 내기 직전'의 형식으로 치환했다.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 이전의 상태를 작품의 단위로 삼은 것이다. 미완성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립 가능성 자체를 형식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선택은 영리하다.
화면 크기가 29.7×21cm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A4다. 사무실의 규격, 보고서와 일지의 규격. 그런데 이 종이의 가로세로 비가 1 대 루트2라는 점이 재미있다. 반으로 접어도 비율이 그대로 유지되는 유일한 직사각형이고, 그래서 무한히 분할해도 자기 자신을 닮는다. 작가가 "파츠는 작업의 최소 단위"라고 말할 때, 그 최소 단위가 하필 무한 분할이 가능한 규격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우연이라 해도 아름다운 우연이다.
제목의 '해적선'과 2026년 개인전 제목 《Launched Protocol》을 나란히 놓으면 또 다른 층이 열린다. 우리는 해적을 무법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는 정반대를 말한다. 17~18세기 해적선은 항해 규약(articles)을 문서로 작성하고 선원 전원의 서명으로 발효시켰으며, 선장을 투표로 뽑고 전리품 분배와 부상 보상까지 조항으로 정해 두었다. 국가보다 먼저 계약과 프로토콜로 움직인 조직이 해적선이었다. 무법의 이미지 아래 실은 지독한 규약이 있었다는 이 반전은, 손으로 그린 수묵 아래 조립 규격이 깔려 있는 민범의 화면과 정확히 겹친다.
한국화 전공자가 '조립'을 말한다는 것이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동양화만큼 모듈에 익숙한 회화도 드물다. 청나라의 《개자원화전》은 소나무 그리는 법, 바위 주름 잡는 법, 인물 앉히는 법을 유형별로 정리한 일종의 부품 카탈로그였고, 준법(皴法)이라는 이름의 붓질 규격이 수백 년간 공유되었다. 화가는 그 부품들을 조합해 화면을 세웠다. 민범이 런너에서 발견한 형식은 그러므로 서구 산업사회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전공의 오래된 문법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발음한 것에 가깝다. 전통은 계승할 때보다 번역할 때 살아난다.
먹은 지울 수 없다. 한 번 스민 자리는 되돌릴 수 없고, 그래서 수묵은 비가역의 매체다. 반면 파츠는 오려 내고 재배치할 수 있다. 민범은 이 두 성질을 한 작품 안에 동거시킨다. 한 획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 획이 담긴 장(張)은 언제든 더 큰 회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로 되돌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이것은 사실 우리 인생의 문법이기도 하다.
숫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45, 21, 8 같은 번호가 화면 곳곳에 무심히 박혀 있는데, 이는 부품 번호이자 조립 설명서의 좌표다. 미술이 숫자를 화면에 들일 때는 대개 두 가지 이유에서다. 재스퍼 존스처럼 기호 자체를 회화의 대상으로 삼거나, 개념미술처럼 체계를 드러내거나. 민범의 숫자는 셋째 길로 간다. 그것은 아직 조립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표식, 즉 미래 시제의 기호다. 숫자가 있다는 것은 이 조각이 어딘가에 끼워질 자리를 이미 배정받았다는 뜻이니까.
컬렉터에게 이 작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파츠 하나를 소장한다는 것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성장하는 시리즈의 한 좌표를 갖는 일이다. 번호가 15에서 18까지 이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앞뒤로 열린 시간을 가리킨다. 작가의 작업 일지를 벽에 거는 셈이니, 이 컬렉션은 작가가 자라는 만큼 함께 자란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