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 산(b.1991) 사라진 것이 남기고 간 빛
김 산(b.1991) (홍익대 11학번 회화)
〈흰 그림자〉 2025, 나무 패널에 혼합재료·스프레이, 40.9×31.8cm
— 사라진 것이 남기고 간 빛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44
짙은 청록의 화면 한가운데를 흰 줄기가 세로로 가로지른다. 줄기는 위로 갈수록 잘게 갈라지고, 갈라진 가지는 다시 더 잘게 나뉜다. 사이사이에 흰 점들이 눈처럼 혹은 별처럼 흩어져 있다. 처음엔 강의 삼각주로 보이고, 다음엔 서리 낀 창으로 보이고, 조금 더 보면 신경세포의 수상돌기 같기도 하다. 무엇이라 단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데, 김산이 원한 것이 정확히 이 지속인 듯하다.
'흰 그림자'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림자는 검다는 전제를 제목이 먼저 깬다. 그러나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 지각의 이름이기도 하다. 강한 빛을 보고 눈을 감으면 망막에 밝은 잔상이 남는다. 대상은 이미 사라졌는데 감각은 남는다. 작가가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흔적"이라고 쓸 때, 나는 이 문장이 관념이 아니라 신체 경험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라고 느꼈다.
이 분기(分岐)의 형상이 낯설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강줄기와 번개, 나무의 가지, 폐의 기관지, 혈관, 그리고 뉴런은 모두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자연이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공간에 닿으려 할 때 반복적으로 도달하는 해답이 바로 이 갈라짐이다. 수학은 이를 프랙탈이라 부른다. 김산의 화면이 풍경 같기도 하고 신체 같기도 한 것은 그의 손이 모호해서가 아니라, 풍경과 신체가 원래 같은 문법을 쓰기 때문이다.
스프레이라는 선택도 눈여겨볼 만하다. 붓은 화면에 닿아야 흔적을 남기지만, 스프레이는 닿지 않고 내려앉는다. 압력도 방향도 없는 입자들이 중력에 실려 쌓인다. 실체 없이 층이 생기는 것이다. 부재를 다루겠다는 작가가 접촉 없는 도구를 고른 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판단이다. 게다가 나무 패널의 단단한 표면 위에서 그 입자들은 흡수되지 않고 표면에 머무는데, 그래서 이 작품은 조명이 바뀔 때마다 다르게 반짝인다.
색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짙은 청록은 동양 회화에서 청록산수(靑綠山水)의 색이다. 수묵이 담담한 사유의 색이라면 청록은 이상향의 색, 신선이 사는 곳의 색이었다. 김산은 그 색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흰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이 화면은 이상향 위에 부재를 적어 놓은 셈이다. 아름다운 배경일수록 사라진 것이 더 또렷해진다는 것을, 이 젊은 화가는 색으로 알고 있다.
부재를 기록하는 장치는 근대에도 여럿 있었다.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은 밝은 것을 어둡게, 어두운 것을 밝게 뒤집어 기록하고, 엑스레이는 살을 통과시켜 뼈만 남긴다. 지문 채취는 만졌던 손이 떠난 자리를 가루로 드러낸다. 모두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남긴 자국을 붙드는 기술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을 '그것은-존재-했음'이라 요약했을 때 가리킨 것도 이 자국의 시제였다. 김산의 회화는 그 계보 위에 가위와 칼로 오린 종이로 만든 자국을 하나 더 얹는다. 기계가 아니라 손이 남긴 부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작업의 자리는 뚜렷하다.
2024년 개인전 제목은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였다.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다음에 와야 할 말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다. 나는 이 생략이 김산 회화의 태도라고 본다. 다 알면서도 그린다는 것,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남긴다는 것. 홍익대 11학번, 학부를 마친 뒤에도 십 년 넘게 이 문장을 끝맺지 않고 붙들어 온 작가의 시간이 화면의 밀도로 쌓여 있다.
4호 남짓한 작은 그림이다. 컬렉터로서 이런 크기의 작품을 나는 편애하는 편이다. 큰 그림은 공간을 지배하지만 작은 그림은 사람을 불러 세운다. 침실 머리맡이나 복도의 좁은 벽처럼 오래 마주치는 자리에 걸어 두면, 어느 날 문득 부재가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문장이 몸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이 그림의 값이 완성되는 시점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