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김연도(b.1997) - 빛을 그리지 않고 빛의 자리를 비우다
김연도(b.1997) (경희대 대학원 24학번 한국화)
〈10791번째 밤〉 2026, 광목에 수묵, 72×50cm
— 빛을 그리지 않고 빛의 자리를 비우다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34
검다. 처음 몇 초는 그저 검다. 그러다 아파트 한 동이 떠오르고, 옥상 난간이 떠오르고, 오른쪽 위에서 달이 반지처럼 걸린 것이 보인다. 아래쪽 가로등 하나가 흐릿한 후광을 두르고 서 있고, 왼편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빛이 터져 나온다. 이 그림은 관객에게 어둠에 눈이 익을 시간을 요구한다. 밤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어둠은 즉시 보이지 않고, 기다려야 보인다.
작가의 문장이 인상적이다. "먹은 지울 수 없고 쌓을 수만 있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과 닮았다. 그리하여 나는 빛을 그리지 않고, 어둠을 쌓아 빛이 될 자리를 비워 둔다." 나는 이 두 문장이 젊은 작가가 쓴 가장 정확한 재료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동양화의 여백은 본래 흰 종이가 남는 자리였다. 김연도는 그 관계를 뒤집는다. 그의 화면에서 여백은 빛이고, 채워진 것은 어둠이다. 밤을 그린다는 것은 여백의 방향을 반대로 세우는 일이었다.
제목의 숫자를 나는 오래 헤아려 보았다. 10791일은 약 29년 6개월이다. 누군가가 지나온 밤의 수를 하루 단위로 셈해 붙인 제목인 셈이다. 아마도 작가 본인이 지내온 밤의 날 수라고 추측해본다. 그런데 이 작가의 2025년 개인전 제목이 《n번째 밤을 지새우고》였다는 사실이 이 숫자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미지수 n이 마침내 10791이라는 특정한 값을 얻은 것이다. 대수(代數)에서 산술(算術)로 넘어오는 이 한 걸음은 작지 않다. 막연히 반복되던 밤이 어느 순간 셀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개인전 제목들을 늘어놓아 보면 이 화가가 밤에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n번째 밤을 지새우고》, 《깊은 밤 메아리》, 《야상곡》. 메아리와 야상곡, 둘 다 소리의 이름이다. 밤은 시야가 좁아지는 대신 청각이 열리는 시간이고, 그래서 밤을 그리는 화가는 자꾸 소리 쪽으로 제목을 가져간다. 흥미롭게도 그는 202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California Life, Gangwon Life》에 참여했다. 빛이 넘치는 도시와 어둠이 남아 있는 산간을 나란히 놓는 기획이었으니, 이 작가에게는 더없이 맞춤한 자리였을 것이다.
바탕이 종이가 아니라 광목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화선지는 먹을 순식간에 빨아들여 번지게 하지만, 무명실로 짠 광목은 먹을 더디게 받아들이고 올 사이에 붙든다. 스미는 대신 걸린다. 수십 번을 덧칠해야 이만한 깊이가 나오는데, 그 반복이 그대로 밤을 지새운 횟수처럼 축적된다. 재료의 성질과 주제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 작품이 그렇다.
밤을 그린 화가들의 계보를 떠올려 본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촛불, 반 고흐의 별이 흐르는 론강, 그리고 휘슬러의 녹턴 연작. 휘슬러가 회화에 음악 용어를 붙여 〈야상곡〉이라 이름했을 때 비평가 러스킨은 물감통을 관객 얼굴에 끼얹었다며 조롱했고, 두 사람은 법정까지 갔다. 형체가 흐릿한 밤 그림이 그 시절엔 미완성으로 보였던 것이다. 김연도의 2026년 개인전 제목이 하필 《야상곡》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젊은 화가가 어떤 계보에 자기 이름을 얹으려 하는지가 보인다.
한 가지 더. 도시의 밤은 이제 진짜 밤이 아니다. 인공조명이 하늘을 물들여 별을 지운 지 오래고, 천문학자들은 이를 빛공해라 부른다. 역설적으로 어둠은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가로등이 어둠 속에서야 제 쓸모를 드러낸다는 작가의 문장은 그래서 서정적인 관찰이면서 동시에 도시 생태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밤이 아니라, 밤이 사람에게 하던 일이다.
어두운 그림은 벽을 가린다는 이유로 컬렉터들이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정반대다. 밝은 그림은 방을 채우고, 어두운 그림은 방을 깊게 만든다. 이 작품을 걸려면 조명을 조금 낮춰야 하는데, 그 낮춤 자체가 공간을 바꾼다. 그림 한 점이 집의 조도를 바꾸는 일, 나는 그것을 좋은 컬렉션의 부수적 효과라고 부른다. 젊은 나이로 이만한 어둠을 쌓을 줄 아는 손이라면, 십 년 뒤의 밤은 훨씬 더 깊어져 있을 것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