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박미정(b.1990) - 제목이 약속한 것을 화면은 주지 않는다
박미정(b.1990) (숙명여대 조형예술학 박사)
〈부유하는 이미지 조각과 빨간 사각〉 2025, 캔버스에 아크릴, 51.2×40.7cm
— 제목이 약속한 것을 화면은 주지 않는다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24
먼저 제목을 읽고 화면을 본 사람은 잠시 당황하게 된다. 빨간 사각이 없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거뭇한 덩어리 몇이 떠 있고, 푸른 자국이 비스듬히 지나가고, 아래쪽에 작은 얼룩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 물러서면 알게 된다. 붉은 기가 도는 이 살구빛 바탕, 이 사각형 자체가 제목이 말한 빨간 사각이라는 것을. 찾던 대상이 배경이었던 셈이다.
이 뒤집기는 회화사의 오래된 농담과 닿아 있다. 말레비치가 1915년에 내건 〈붉은 사각형〉은 사각형 하나만으로 회화가 성립함을 선언한 그림이었다. 그는 사각형을 그렸다. 박미정은 그리지 않고, 대신 캔버스 자체가 사각형이 되게 두었다. 그린 것과 그려진 것을 가르는 경계를 슬쩍 밀어 본 것이다. 작가가 노트에 "기존의 틀이나 당연하게 여겨지던 관념들을 흔든다"고 쓴 그 틀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틀이기도 하다.
떠 있는 덩어리들의 정체는 잡지 이미지다. 다만 젤 프린팅이라는 공정을 거치며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광고 사진이었을 그 이미지들은 지시성을 잃고 순수한 선과 면으로만 남았다. 매일 수천 장의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형태의 잔해로만 남는다는 사실을 이 화면은 조용히 증언한다. 이미지의 과잉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진에 관한 그림이다.
젤 프린팅은 흥미로운 기법이다. 판을 새기지 않고 말랑한 젤 판에 물감을 올려 찍는데, 매번 결과가 달라 같은 판으로도 같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복제를 위해 고안된 판화의 원리로 유일본을 만드는 역설이 여기 있다. 게다가 작가는 습도까지 변수로 끌어들인다. 물감이 마르는 속도가 그날의 공기에 따라 달라지고, 그 차이가 형상을 결정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작업 조건으로 삼는 태도, 존 케이지가 우연을 작곡에 들여왔을 때와 같은 종류의 결단이다.
제목의 첫 단어가 '부유'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뜬다는 것은 어디에도 붙지 않았다는 뜻이고, 붙지 않은 것은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작가는 이 조각들이 캔버스 안팎을 자유롭게 부유한다고 썼는데, 여기서 '밖'이 중요하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간 얼룩들은 그림이 프레임 안에서 완결되지 않고 벽으로 계속된다는 신호다. 잡지라는, 이제는 저물어 가는 인쇄 매체의 조각들이 마지막으로 부유하는 장소가 회화라는 사실도 어딘가 애틋하다.
이 작가의 전시 제목들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그 태도가 더 선명해진다. 《오징어는 자기 먹물을 선택한다》, 《받침대에 잡아먹힌 테이블》, 《동굴은 무대다》, 《신선한 조각을 호흡하시오》, 《숨놓기 숨뜨기》. 하나같이 문장이고, 하나같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 받침대가 테이블을 잡아먹는다는 말은 브랑쿠시 이래 조각이 좌대와 벌여 온 오랜 실랑이를 한 줄로 요약하고, 오징어가 먹물을 선택한다는 말은 작가와 매체의 관계를 뒤집는다.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화면을 다루는 감각과 같은 곳에서 나온다.
학사와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친 작가가 통제를 놓는 작업을 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개는 반대다. 훈련이 쌓일수록 손은 정확해지고, 정확해질수록 우연이 들어설 자리가 좁아진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밟은 손이 굳이 예측 불가능한 공정을 택했다면, 그것은 기술을 못 갖춰서가 아니라 기술 다음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그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그리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
컬렉터에게 이런 화면은 오래 간다. 형상이 확정되지 않은 그림은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지도로 보이고, 어떤 날은 물 위에 뜬 기름으로 보인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헤르만 로르샤흐 (Hermann Rorschach)의 좌우대칭의 잉크 얼룩이 그러하듯 이 그림도 보는 사람의 그날을 되비춘다. 40호가 채 안 되는 크기라 부담도 적다. 다만 이 작품은 조명 아래 정면으로 걸어야 한다. 젤 프린팅이 남긴 미세한 질감이 빛의 각도에 따라 살아나기 때문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