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박예지(b.1988) - 별의 마지막 원소로 빚은 한 송이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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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기록 (3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박예지(b.1988) - 별의 마지막 원소로 빚은 한 송이    네이버 구글

박예지(b.1988) (프랑스 에꼴 불(École Boulle) 응용미술과 졸업) 〈꽃처럼 16〉 2026, Steel, 49.5×19×14.8cm — 별의 마지막 원소로 빚은 한 송이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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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16 2026, Steel, 49.5×19×14.8cm

 

붉게 산화된 강철 덩어리가 접힌 채 바닥에 앉아 있고, 그 틈에서 가느다란 철판 몇 장이 잎처럼 솟아오른다. 잎들은 위로 갈수록 몸을 비틀고, 맨 꼭대기에서 아직 벌어지지 않은 봉오리 하나가 하늘을 향한다. 강철로 만든 꽃이다. 가장 단단한 재료로 가장 짧게 사는 것을 빚었다는 이 첫 번째 역설이 〈꽃처럼〉 연작의 출발점이다.

작가의 이력이 이 형태를 설명해 준다. 그는 파리의 에꼴 불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했다. 루이 14세의 궁정 가구 장인 앙드레 샤를 불(André-Charles Boulle)의 이름을 딴 학교, 상감과 세공의 전통이 삼백 년 넘게 이어져 온 곳이다. 만드는 손의 계보에서 출발한 사람은 재료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그에게 강철은 표현의 수단이기 이전에 다뤄야 할 성질을 가진 상대다. 접히는 각도, 두께가 견디는 한계, 열이 지나간 자리의 색. 이 조각의 붉은 기는 칠한 색이 아니라 강철이 공기와 만나 스스로 낸 색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순환'이라는 단어는 은유가 아니다. 철은 녹슨다. 산화는 철이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고, 그러니 강철로 만든 꽃 역시 아주 느리게 지고 있는 중이다. 꽃이 며칠에 걸쳐 하는 일을 이 조각은 수십 년에 걸쳐 한다. 속도만 다를 뿐 방향은 같다. 작가가 물성과 순환에 집중하며 꽃의 생성과 소멸을 떠올린다고 쓴 문장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조금 더 멀리 가 보자. 철은 별이 만드는 마지막 원소다. 항성은 수소부터 시작해 점점 무거운 원소를 합성해 가다가 철에 이르러 멈춘다. 철보다 무거운 원소는 초신성이 터져야 만들어진다. 우리 혈액 속 헤모글로빈의 철도, 이 조각의 강철도 모두 어느 별의 마지막 순간에서 왔다. 별의 재로 꽃을 빚는 일. 생성과 소멸이라는 주제를 이보다 정확히 담아낼 재료는 없다.

접힌 받침 부분의 조형도 눈여겨볼 만하다. 평평한 판을 꺾어 입체를 만드는 방식은 전개도의 사고다. 종이접기가 그러하듯, 이 방식은 완성된 형태 뒤에 항상 펼쳐진 평면을 남겨 둔다. 응용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 특유의 감각이다. 2010년 파리 롱샹 경마공원 리노베이션이라는 가상 프로젝트로 국립고등기술자격을 취득했다는 이력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도면으로 먼저 세워 본 경험, 그 훈련이 지금 꽃의 뼈대를 세우고 있다.

철을 용접해 형태를 세우는 일에는 20세기 조각의 굵은 계보가 있다. 훌리오 곤살레스(Julio González)가 용접을 조각의 언어로 끌어들이고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가 그것을 미국 조각의 뼈대로 삼은 이래, 강철은 산업의 재료이자 남성적 구축의 상징으로 다뤄져 왔다. 박예지는 그 계보의 도구를 쥐고 정반대의 대상으로 간다. 구축이 아니라 개화, 기념비가 아니라 한 송이.

작가는 이 작업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지나며 변하고 이어지는 존재의 흐름. 실제로 이 조각의 잎들은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휘어 있다. 접촉 없이 이루어지는 동조, 새 떼나 물고기 떼가 보여 주는 그 움직임을 닮았다. 관계란 붙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방향에 영향을 주는 상태라는 것을 형태로 말하고 있다.

2026년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연 개인전 제목이 《알타미라의 산책자》였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알타미라는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그림이 있는 동굴이다. 병원이라는,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장소에 구석기의 이름을 가져다 놓은 감각. 이 작가는 시간의 눈금을 아주 길게 두고 사물을 본다.

컬렉터에게 이 작업의 매력은 크기에 있다. 5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실내 조각은 조각 컬렉션의 가장 좋은 입구다. 좌대 없이 선반이나 콘솔 위에 놓을 수 있고, 창가에 두면 하루 동안 그림자가 계속 달라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정면이 없다. 돌려 놓을 때마다 다른 꽃이 되니, 소장자가 계절마다 방향을 바꿔 주는 것만으로도 새 작품이 된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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