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박유진(b.1996) - 봉합하지 않기로 한 경계들
박유진(b.1996) (경희대 대학원 23학번 한국화)
〈녹색 소음〉 2026, 분채·먹·한지 콜라주, 60.6×50.0cm
— 봉합하지 않기로 한 경계들 —
이상민
승인 2026.08.31 01:11
화면 전체가 청록으로 웅성거린다. 가까이 가면 그것이 한 겹의 색이 아니라 잘린 한지 조각 수백이 겹쳐 붙은 결과임을 알게 된다. 조각들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떤 것은 겹치고 어떤 것은 벌어져 아래층을 드러낸다. 찢긴 가장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실 같은 섬유들이 빛을 받아 미세하게 일어선다. 매끄럽게 이어 붙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작가는 그 선택을 이렇게 적었다. 봉합되지 않은 경계는 완결된 이미지이기를 거부한다고.
제목이 흥미롭다. '녹색 소음'은 시적 조어처럼 들리지만 실제 음향공학 용어이기도 하다. 백색소음, 분홍소음처럼 소음에도 색 이름이 붙는데, 그린 노이즈는 중간 주파수 대역에 에너지가 몰린 소리로 숲이나 시냇물의 배경음과 가장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요즘 사람들이 잠들기 위해 틀어 놓는 그 소리다. 화면의 청록빛과 제목의 소음이 자의든 아니든 정확히 같은 주파수에서 만나고 있는 셈이다.
정보이론에서 노이즈는 신호를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이후 통신 기술의 역사는 노이즈를 얼마나 줄이느냐의 역사였다. 그런데 박유진은 반대편에 선다. 그는 소음을 걷어 내지 않고 소음을 그린다. 노트에 적힌 대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의 웅성거림'이다. 지워야 할 것으로 취급되던 것에 자리를 내주는 일, 젊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 가운데 하나다.
주제어인 '터'도 짚어야 한다. 그는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상태로서의 터를 그린다고 했다. 완성된 건물도 아니고 빈 땅도 아닌, 그 사이의 시간. 우리가 사는 도시는 늘 이 상태에 있다. 가림막이 서고, 철거가 되고, 다시 세워진다. 그런데 그 과정은 언제나 가려진 채 진행되고, 우리는 결과만 본다. 이 화면은 그 가려진 구간을 펼쳐 놓는다. 완성 이전이 아니라 완성이 없는 상태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이다.
재료의 선택이 주제와 한 몸이라는 점이 이 작업의 미덕이다. 한지는 원래 겹쳐서 강해지는 종이다. 배접(褙接)은 동양 회화가 수백 년간 다듬어 온 기술로, 여러 장을 물풀로 붙여 한 장처럼 만드는 일이다. 박유진은 그 전통의 동작을 그대로 가져오되 마지막 단계를 생략한다. 겹치되 한 장이 되지 않게 두는 것이다. 게다가 재료를 한지로 통일했으니, 이것은 다른 것을 붙이는 콜라주가 아니라 같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붙이는 콜라주다. 몸이 제 상처를 덮는 방식과 닮았다.
수십 차례 물들였다는 그 청록빛도 그냥 색이 아니다. 구리가 오래 산화하면 나오는 동록(銅綠)의 색이고, 오래된 기와와 이끼의 색이며, 시간이 지나야만 얻어지는 색이다. 물감 한 번으로 낼 수 있는 색을 굳이 수십 번 담가 얻었다는 것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색이 배도록 시간을 들였다는 뜻이다. 작품이 다루는 주제가 시간이니 제작 과정 자체가 이미 그 주제를 수행하고 있다.
2025년 KUMA미술관 단체전의 제목이 《모호한 것을 모호한 채로 두기》였다.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 곧 불확실과 의심 속에 성급히 답을 구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능력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우리 시대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한다. 검색하면 답이 나오고, 나오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그 조급함 속에서 모호한 것을 모호한 채로 두겠다고 선언하는 전시 참여가 나는 반가웠다.
컬렉터에게 이런 질감의 작품은 반드시 실물로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도판은 색만 전할 뿐 종이의 두께와 벌어진 틈의 그림자를 전하지 못한다. 측광이 드는 벽에 걸면 조각들의 가장자리가 각각 작은 그림자를 만들면서 화면이 부조처럼 살아난다. 60호가 안 되는 크기지만 벽 하나를 감당할 밀도가 있고,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 어울린다. 낡아 가는 것을 그린 그림은 낡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