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배지인(b.1992) -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최고 1,411명
어제 1,278명
오늘 413명
홈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 취향의기록
취향의기록 (3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배지인(b.1992) -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    네이버 구글

배지인(b.1992) (경희대 대학원 24학번 한국화) 〈사랑을 담아 With Love〉 2026, 캔버스에 수채와 유채, 53.0×45.5cm —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 —
이상민   승인 2026.08.31 00:59
a b

b5da30fa38371aa160aebfe3dfdf2eb7_1788105483_2784.jpg

사랑을 담아 With Love 2026, 캔버스에 수채와 유채, 53.0×45.5cm

 

촛불 두 개가 켜진 케이크 뒤로 누군가 서 있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든 그 자세는 생일 사진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몸짓이다. 그런데 얼굴이 없다.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뿌옇게 풀려 있고, 배경의 보랏빛과 갈색이 그 자리로 흘러들어 왔다. 사진이라면 초점이 나갔다고 할 장면인데, 이것은 그리는 손이 일부러 놓아 버린 초점이다.

기억을 다루는 화가들이 흐림을 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가족사진을 옮겨 그리면서 붓으로 화면을 쓸어 흐리게 만들었다. 선명하게 그리면 회화가 사진의 자리를 대신해 버리기 때문이다. 흐림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회화가 사진과 다른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배지인의 화면도 같은 자리에 선다. 이 그림은 그날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날을 떠올리는 지금의 상태를 보여 준다.

작가의 문장이 그 점을 분명히 한다. 사진에 맺힌 시간이 있고, 그 조각들을 캔버스 위에서 겹치고 지운다고. 겹치고 지운다는 이 두 동작이 중요하다. 신경과학에는 ‘기억의 재응고’라는 개념이 있다. 기억은 창고에 보관된 물건이 아니라, 떠올릴 때마다 잠시 불안정해졌다가 다시 저장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주 떠올린 기억일수록 원본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겹치고 지우는 붓질은 그 생리를 그대로 재현한다.

재료의 조합도 이 주제를 밀어붙인다. 수채와 유채를 한 화면에 함께 쓴다는 것은 물과 기름을 함께 쓴다는 뜻이다. 두 매체는 섞이지 않는다. 수채는 스미고 유채는 덮는다. 스민 것은 지울 수 없고 덮은 것은 아래를 감춘다. 기억과 현재가 한 화면에서 만나되 결코 하나로 융합되지 않는 상태를, 이보다 물리적으로 정직하게 보여 줄 방법이 있을까 싶다. 화면 곳곳에 유채가 얹히지 못하고 물러난 자리가 보이는데, 그 어긋남이 이 그림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제목 'With Love'는 편지의 맺음말이다. 본문이 끝난 뒤 마지막 줄에 적히는 관용구. 내용이 무엇이었든 이 한 줄이 붙으면 편지는 사랑의 문서가 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본문이 없다. 맺음말만 남고 내용은 지워졌다. 우리가 오래된 관계에서 결국 기억하는 것도 대개 그렇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잊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만 남는다.

이 작가가 붙여 온 다른 제목들도 같은 결을 갖는다.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들》, 《닿은 오후》, 《손과 손사이》. 질량이 없는 것은 빛이다. 그리고 사진은 어원 그대로 빛으로 쓴 글이다. 붙잡을 수 없으면서 분명히 도착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제목마다 반복된다. 《손과 손사이》라는 제목은 이 화면의 모아 쥔 두 손과 곧바로 이어진다. 사이란 닿아 있으면서 동시에 벌어져 있는 상태의 이름이다.

촛불이 두 개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짚고 싶다. 왼쪽에 두 개의 초가 더 보이긴 하지만 불이 켜진 것인지 과거의 기억인지 불분명하다. 두 개든 네 개든 특정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중요하다. 얼굴을 지우고 나이를 모호하게 두는 순간 이 장면은 한 사람의 사진이기를 그치고 모두의 기억이 된다. 관객은 자기 앨범 속 비슷한 장면을 여기 겹쳐 놓게 되고, 그때 이 그림은 완성된다. 조난된 좌표 위에서 방황하는 현재를 회화로 호출한다는 작가의 문장은 그런 뜻일 것이다.

컬렉터에게 이런 그림은 위험하면서 좋다. 위험한 이유는 개인적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고, 좋은 이유도 같다. 취향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그림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53×45.5cm의 아담한 크기는 거실보다 사적인 공간에 어울린다. 침실 문 옆이나 서재 책상 뒤처럼 혼자 마주치는 자리가 좋겠다. 그리고 이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장자의 기억을 더 많이 흡수할 것이다. 그림이 늙는 것이 아니라 소장자와 함께 기억을 쌓는 종류의 작품이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0 Comments
아트인코리아 그림감상문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