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오현지(b.2000) 쿠키와 캐시, 두 개의 저장소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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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기록 (3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오현지(b.2000) 쿠키와 캐시, 두 개의 저장소    네이버 구글

오현지(b.2000) (경희대 대학원 24학번 조소) 〈Cache〉 2026, 자작나무 합판·목재·우드 스테인, 25×11.6×11.7cm — 쿠키와 캐시, 두 개의 저장소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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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he 2026, 자작나무합판, 목재, 우드 스테인, 25×11.6×11.7cm

 

작은 나무 구조물이다. 가느다란 살대를 촘촘히 건 사각 틀 위에 둥근 나무 원반 세 개가 놓여 있고, 그 틀을 두 개의 다리가 엇갈려 받치고 있다. 쿠키를 식히는 망 같기도 하고 접이식 스툴 같기도 하다. 25센티미터 남짓, 손으로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다. 그런데 제목이 'Cache'다. 이 한 단어가 소박한 목조를 전혀 다른 층위로 데려간다.

쿠키와 캐시는 웹 브라우저가 쓰는 두 가지 저장 방식이다. 쿠키는 사용자를 식별하기 위해 남기는 작은 기록이고, 캐시는 다시 방문했을 때 빠르게 불러오려고 미리 담아 두는 임시 저장소다. 하나는 나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오현지는 이 두 단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 나무로 조각했다. 쿠키라는 이름의 과자를 만들고, 그것을 놓아 두는 구조에 캐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말장난은 생각보다 정확한 곳을 짚는다. 컴퓨터 용어 쿠키(cookie)의 유래를 두고 여러 설명이 오가지만,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헨젤과 그레텔이 길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Cookie crumbs)다. 돌아올 길을 표시하려고 뿌린 그 조각들은 명백한 저장 장치였고, 새들이 먹어 치우면서 데이터는 소실되었다. 이 작가의 2025년 전시 제목이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과자부스러기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것이 우연한 착상이 아니라 오래 붙들어 온 계보임을 알게 된다. 흔적을 남기는 일과 그 흔적이 사라지는 일을 한 이야기 안에서 다루고 있다.

캐시(cache)라는 단어 자체도 숨기다(cacher)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왔다. 사냥꾼이나 탐험가가 물자를 묻어 두던 은닉처가 원래의 캐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컴퓨터의 캐시도 사용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머무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시도라는 작가의 문장은 그러니 은유가 아니라 어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온 말이다.

작가노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조개껍질이다. 조개는 외투막 가장자리에서만 탄산칼슘을 분비하기 때문에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자란다. 그래서 껍질은 로그 나선을 그리며 감기는데, 이 나선은 커져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 자기유사 구조다. 조개껍질은 그 자체로 성장의 기록물이자 시간의 저장 장치인 셈이다. 나이테와 같은 원리다. 작가가 조개껍질이 하나의 감기는 방향으로부터 형상을 구축한다고 쓸 때, 그는 저장이 곧 형태가 되는 자연의 사례를 정확히 짚고 있다.

재료가 자작나무 합판이라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합판은 얇게 켠 판을 결의 방향을 엇갈려 겹쳐 붙인 재료다.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마다 방향이 다르며, 그래서 통나무보다 튼튼하다. 저장의 구조를 다루는 작가가 층으로 저장된 나무를 골랐다는 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잘 맞는다. 잘린 단면마다 몇 겹인지가 그대로 보이는 재료이니, 이 조각은 표면만 보아도 자기 구성을 고백하고 있다.

2026년 전시 제목 《Double Buffering》 역시 같은 어휘장에서 나왔다. 화면의 깜빡임을 없애기 위해 두 개의 버퍼를 번갈아 쓰는 그 기법의 핵심은, 우리가 보는 화면 뒤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한 장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준비된 것이 계속 자리를 바꾸며 매끄러움을 만들어 낸다.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도 그렇고, 조각이 만들어지는 방식도 그렇다. 이 
작가는 디지털 세계의 용어를 빌려 오되 그것을 유행처럼 소비하지 않고 원리까지 파고들어 물질로 옮긴다.

컬렉터에게 25센티미터의 목조는 아주 매력적인 물건이다. 벽이 필요 없고, 책상이나 선반 위에서 존재감을 낸다. 손으로 들어 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조각은 원래 만지고 싶어지는 예술인데 대개의 조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무게와 크기가 그 욕구를 어느 정도 받아 준다. 다만 목재이므로 직사광선과 급격한 습도 변화는 피해야 하고, 우드 스테인 마감은 시간이 지나며 색이 깊어진다. 소장자와 함께 천천히 색이 변해 가는 작품, 그 자체로 하나의 저장 장치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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