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유가월(b.1988) 물이 먼저 그리고 붓이 뒤따르다
유가월(b.1988) (중국 화난사범대 중국화 학사 / 서울대 대학원 동양화 석사 / 동 대학원 미술학 박사)
〈수국 선경 02〉 2022, 순지에 채색, 30×30cm
— 물이 먼저 그리고 붓이 뒤따르다 —
이상민
승인 2026.08.30 23:24
30센티미터 정사각형 안에 산이 겹겹이 서 있다. 초록과 분홍, 자주와 금빛이 대리석 무늬처럼 흘러 산의 능선을 이루고, 골짜기에는 흰 안개가 고여 있다.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색의 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풍경은 공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감이 스스로 흘러 만든 결이 지형의 논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산을 만드는 방식과 물감이 번지는 방식이 어느 지점에서 같은 문법을 쓰고 있다.
작가는 물의 흐름과 우연이 만들어 낸 흔적 위에 붓질을 더한다고 설명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우연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 먼저 오고 그 위에 손이 얹힌다. 이 순서에는 유서 깊은 계보가 있다. 당나라의 왕흡은 먹을 비단에 뿌린 뒤 그 얼룩을 따라가며 산수를 완성했다고 전해지고, 발묵과 파묵은 그 이후로 동양 회화의 한 축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레오나르도가 제자들에게 얼룩진 벽을 오래 들여다보라고 권했다. 형상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태도가 동서에 함께 있었던 셈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 우연이 만든 무늬가 마블링에 가깝다는 점이다. 물 위에 안료를 띄워 무늬를 만드는 기법은 일본에서 스미나가시, 튀르키예에서 에브루라 불리며 각각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물의 표면장력이 안료를 밀어내며 그리는 그 곡선은 사람의 손으로는 흉내 낼 수 없다. 유가월은 그 곡선을 산의 능선으로 읽었다. 물이 그린 선에서 산을 발견한 것이다. 산이 본래 물에 깎여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이 발견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색채는 청록산수의 계보를 잇는다. 당나라의 이사훈 부자가 확립하고 송의 왕희맹이 〈천리강산도〉로 완성한 그 양식은 먹 대신 광물성 안료로 산을 칠하고 금가루로 윤곽을 밝히는 화려한 산수였다. 문인화가 먹의 절제로 기울면서 오랫동안 뒷자리로 밀려났던 전통이다. 유가월의 화면에서 반짝이는 금색은 그 잊힌 계보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온다. 채색이 수묵보다 격이 낮다는 편견은 근대의 산물일 뿐, 우리 회화사에서 색은 처음부터 있었다.
'선경'이라는 단어도 짚어야 한다. 신선이 사는 땅, 갈 수 없는 곳의 이름이다. 이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 《又见·山海》, 즉 산해를 다시 본다는 뜻이었고 또 다른 전시는 《漫游》, 정처 없이 노닌다는 뜻이었다. 장자가 말한 소요유의 감각이다. 목적지 없이 거니는 것, 도달이 아니라 배회 자체가 목적인 상태. 30센티미터의 작은 화면이 그렇게 넓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그림이 어딘가로 가는 길을 그린 것이 아니라 머무는 방식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이력도 이 화면을 설명해 준다. 중국에서 중국화를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동양화 석사와 미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두 화단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개인전 제목 가운데 하나가 《归: RETURNING》, 돌아옴이었다는 사실이 그래서 여러 겹으로 읽힌다. 어디로 돌아오는가. 아마도 두 전통이 갈라지기 이전의 어떤 자리일 것이다. 이 그림의 색과 물성이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가는 현실과 기억, 감각이 교차하는 산수의 공간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기억'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싶다. 우리가 기억하는 풍경은 사진처럼 남지 않는다. 색은 과장되고 형태는 뭉개지며 어떤 부분만 유난히 선명하다. 이 화면의 비현실적인 색채는 그러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기억의 정직한 재현일 수 있다. 실제로 본 산보다 기억 속의 산이 더 초록이고 더 분홍인 경험을 우리는 모두 갖고 있다.
컬렉터에게 30×30cm의 정방형 소품은 다루기 좋은 크기다. 책장 사이나 좁은 벽면, 심지어 책상 위 이젤에 올려 두어도 좋다. 다만 순지에 올린 광물성 안료와 금은 직사광선에 약하니 볕이 직접 드는 자리는 피해야 한다. 작은 그림일수록 가까이서 보게 되고, 가까이서 볼수록 이 화면은 새로운 것을 내어 준다. 물이 흘러간 자리와 붓이 지나간 자리를 구분해 가며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