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심층전시리뷰] 임서현 개인전 《Dreaming Cave 지하의 기억》 · OMG
감각은 그리기 쉽다, 감정은 그렇지 않다
전시장에서 작가에게 물었다. 감각과 감정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느냐고. 임서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감각은 확실히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감정은 생각의 영역에 있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그 둘이 거의 맞닿아 있다고. 감각 없이 감정만 느끼면 그것은 충분히 느낀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이 질문에는 이유가 있었다. 많은 작가의 화면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대개 감각이다. 차갑다, 뜨겁다, 거칠다 같은 명시적인 상태들. 사실 감각을 그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임서현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며 필자가 만난 것은 감각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것도 슬픔이나 기쁨처럼 이름 붙은 감정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공포심 같은 것,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만큼의 잔인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 감정이 화면에서 걸어 나올 때 감상자는 뜨끔해진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간이 품고 있으나 좋은 감정이라 부를 수 없어 숨겨두는 마음 — 자신의 포악함, 은밀하게 들여다보는 관음의 시선, 아름다운 것을 부숴서라도 소유하고 싶은 충동. 임서현은 그것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꺼내놓는다. 이번 전시가 결국 한 사람의 감정에 대한 고백록으로 읽히는 이유다.
바슐라르의 공간론, 그리고 감정이 몸을 얻는 자리
이지혜 디렉터는 이번 전시의 서문을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으로 열었다. 내밀함을 이해하려면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밝히기보다 그 삶이 깃든 공간을 찾아내는 편이 더 급하다는 통찰, 여기서 공간이 전부이며 시간은 더 이상 기억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명제다. 기억은 공간에 단단히 자리 잡을수록 견고해진다는 것.
적절한 인용이었다. 다만 여기에 한 겹을 덧대고 싶다. 바슐라르가 말한 것은 기억의 장소성이지만, 임서현의 화면에서 장소에 뿌리내린 것은 기억이라기보다 감정이다. 동굴은 그가 어떤 사건을 겪은 곳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 처음으로 몸을 얻은 곳이다. 감정은 원래 형체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공간을 통과할 때 비로소 부피와 온도와 무게를 갖는다. 임서현이 굳이 몸을 밀어 넣어 동굴로 들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전시에서 동굴은 소재가 아니라 방법론이다. 여기에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겹쳐 읽어도 좋다. 과거는 흘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되살아난다는 그 사유는, 나이프로 물감을 밀어 올리고 다시 덮기를 반복해 종유석처럼 시간을 쌓아가는 이 작가의 화면 제작 방식과 정확히 포개진다.
공포와 욕망은 대립항이 아니라 한 몸이다
작가가 동굴 탐험을 시작한 계기는 뜻밖에도 공황장애였다. 병원의 처방이 자신에게는 완전한 답이 아니라고 느낀 스무 살 무렵, 그는 인간은 왜 고통을 느끼는가를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세 가지 해법에 도달했다. 상황을 바꾸는 것, 책을 읽어 깊이를 쌓는 것, 그리고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하는 것. 그가 택한 것은 세 번째였고, 마침 학교에는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동굴 탐험 동아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겪은 시간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동행하는 시간이었다. 통째로 백 미터에 이르는 수직굴, 팔을 뻗어도 벽에 닿지 않는 허공, 매듭 하나를 잘못 묶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소식. 건전지를 아끼려 등을 끄고 벽에 몸을 붙인 채 숨죽이고 있으면 박쥐가 지나가는 소리와 정체 모를 벌레의 기척만이 몸 전체로 들어온다. 그리고 막장을 찍고 좁은 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순간, 사라졌던 심장 박동과 땀 냄새와 신선한 흙냄새가 한꺼번에 되돌아온다. 굴 입구도 둥글고 희었는데, 밖에서 만난 보름달도 둥글고 희었다.
"공포를 몸으로 느껴보니까, 느낀 만큼 그 반대편에 있던 감정이 엄청나게 살아나더라고요." — 작가와의 대화 중에서
이 한 문장이 임서현 회화의 열쇠다. 공포의 반대말은 안도가 아니다. 욕망이다. 두려움을 신체의 극한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평온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맹렬한 열망이다. 그의 화면에서 어둠과 빛, 추락과 상승, 잔혹함과 다정함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대립항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 지닌 앞면과 뒷면이다.
〈추락〉(2026, 116.8×91cm)은 이 명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동굴 통로에서 여러 몸이 뒤엉킨 채 떨어진다.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떨어지는 와중에도 손은 횃불을 놓지 않았고, 발 하나는 한 뼘 남짓한 바위 턱을 끝내 찾아 디딘다. 작가는 여기서 사르트르를 떠올렸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안식 없는 영원한 추락이라는 것. 실제로 그 턱은 누군가 실족해 목숨을 잃은 자리이기도 하다. 턱은 늘 부서지고, 누군가 구덩이에서 꺼내주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꺼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림 속의 발은 끝까지 디딜 자리를 찾는다. 절망의 도상 안에 이미 의지가 심겨 있는 것이다.
허기 —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정
〈허기진 바다〉(2025, 90.9×60.6cm, oil and cotton on canvas)는 이 전시에서 가장 오래 붙들리는 작품이다. 검푸른 물이 생명을 삼킬 듯 넘실대는데, 그 어둠은 동시에 빛을 품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이 그림은 명상에 깊이 몰두하던 시기에 나왔다. 반년 가까이 명상을 이어가며 그가 몸으로 만난 것은 고요가 아니라 거대한 허기였다. 더 많이 그리고 싶고, 더 많이 싸우고 싶고, 무엇인지 모를 것을 자꾸 해내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고 했다. 이렇게 큰 허기를 지녔기 때문에 이토록 빨리 그리고, 이토록 많은 것을 바라며, 어쩌면 그것을 얻을 수도 있겠다고. 공포가 큰 만큼 열망이 커지듯 허기가 클수록 삶의 의지도 커진다. 중요한 것은 그 허기를 감정의 상태로만 두지 않고 감각으로 충분히 껴안아 보는 일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감정과 감각이 맞닿아 있다는 앞서의 답이 여기서 실물이 된다. 몸으로 겪지 않은 감정은 아직 다 느낀 감정이 아니다.
박제하고 싶은 마음 — 잔혹함이라는 정직한 고백
작가는 최면을 통해 이른바 전생을 들여다본 경험도 들려주었다. 그 자신은 그것을 실제의 전생이라기보다 무의식이 들려준 비유적 서사에 가깝다고 해석한다.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 모두에게 사랑받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정작 사람을 좋아하지 않던 자신. 마을 외곽의 가난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이의 생기와 발랄함을 갖고 싶어 뒤를 쫓다가 장난삼아 쏜 화살에 말이 넘어지며 소녀가 죽는다. 그리고 그는 마치 구조자인 양 시신을 수습해 장례식장에 내려놓고, 꽃을 놓는 척하며 몰래 그 손을 만진다.
이야기를 마치며 작가가 내린 결론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결국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닮았다는 것. 생기 있고 생동하는 존재를 붙잡아 박제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이보다 정직한 창작론의 고백을 최근에 들어본 적이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소유하려는 폭력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예술가는 그 뿌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양희 큐레이터가 지난해 이 작가에 대해 쓴 리뷰는 이 대목에서 다시 읽힌다. 그는 임서현의 화면에서 형상들이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서로를 포함한다고 보았고, 작가가 구체적인 상황을 재현하기보다 생에 대한 응축된 감정을 동화와 신화와 성화의 형식으로 옮겨놓는다고 진단했다. 〈호랑이와 들꽃다발을 든 사람〉(2025)에 대한 그의 독해 — 호랑이와 토끼가 얽힌 상황에 개입하는 한 사람과, 무심히 들꽃을 든 채 비켜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사람 — 는 특히 정확하다. 개입과 방관, 구원과 무관심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그는 이 작가의 작업이 불안과 극복, 위로 같은 양가적 감정을 두루 끌어안는다고 보았는데, 그 양가성이야말로 임서현이 그리는 감정의 정체다.
힘을 빼자 형태는 흐려지고 감정은 선명해졌다
이번 전시에서 회화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밀도의 조절이다. 임서현은 원래 대단히 잘 그리는 화가란다. 얼굴도 정확하고 짐승도 정확하고 뼈도 정확하다. 그래서 물감을 얇게 계속 올리며 도상을 정교하게 완성해왔고, 그 결과 화면은 종종 상징으로 굳어져 읽혔다. 갤러리 디렉터가 그에게 건넨 조언은 간명했다. 힘을 좀 빼보자는 것.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형태가 흐려지자 오히려 전달이 선명해졌다. 문장을 쓰듯 그리려던 손이 놓이면서, 드로잉에서만 살아 있던 뉘앙스가 캔버스로 건너온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감각은 명료한 윤곽을 요구하지만 감정은 윤곽을 지워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이전의 흔적 위에 새로운 층이 덮이며 광물의 결정처럼 시간을 얻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감정이 퇴적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유영〉(2026, 65.1×53cm), 〈피난 별〉(2026, 25.5×18cm), 〈날갯짓〉(2026, 30×30cm)이 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인간과 나무, 새와 사람의 경계가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번져가며, 존재들은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포개지고 스며든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인다는 서문의 문장은 이 지점에서 정확하다. 화면 규모의 양극도 눈여겨볼 만하다. 162.2×112.1cm의 〈흩어지는 우물의 단면〉과 〈불을 옮기는 녹색 풍경〉이 전시의 골격을 세운다면, 20×40cm의 〈원시의 영감〉이나 25.5×18cm의 〈피난 별〉 같은 소품들은 그 골격 사이에 감정의 파편을 흩뿌리며 리듬을 만든다.
그래도 결국 따뜻한 쪽으로
그렇다면 이 모든 어둠과 허기와 잔혹함의 고백은 어디를 향하는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 기괴할 수도 있고 일부러 불편한 감정이 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포옹하고 있다거나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거나 기원하고 있다거나, 결국은 좀 따뜻한 쪽으로 가고 싶다고.
〈품〉(2025, 53×32.3cm, oil on cotton)은 그 마음이 가장 부드럽게 내려앉은 자리다. 면천 위에 유화 매체가 스며들며 번지는 이 작은 화면에서 포옹하는 손은 유난히 작아 아기의 손 같기도 하고 태아의 손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겹침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두 몸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번져 들어가는 것. 〈겹침〉(2026), 〈몸들의 결정화〉(2026), 〈연결〉(2026)이 같은 계열에 놓인다. 신양희 큐레이터가 짚었듯 이 작가의 인물들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위로하며, 관계 속에서 자란다.
여기에 이 전시의 진짜 서사가 있다. 임서현은 자신의 공포와 욕심과 잔혹함을 화면에 꺼내놓지만, 그것을 전시하기 위해 꺼내는 것이 아니다. 꺼내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꺼내는 것이다. 억압하면 병이 되고 표현하면 작품이 된다. 스무 살의 공황장애를 동굴 백 미터로 갚아낸 사람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내밀한 고백은 왜 위로가 되는가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담아두고 꺼내지 않는 이야기를 지니고 산다. 아름다운 것을 부수고 싶었던 순간, 남의 불행 앞에서 스쳐간 안도, 사랑한다면서 소유하려 했던 마음.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예의이자 사회적 성숙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래서 그 감정들은 각자의 지하에 고여 굳는다.
임서현의 그림이 감상자를 뜨끔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대신 그것을 꺼내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뜨끔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뜻밖에도 안도감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내밀한 고백이 위로가 되는 원리는 문학에서도 미술에서도 다르지 않다. 극복은 감정을 없애는 데서 오지 않고 감정을 마주 보는 데서 온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기보다 무언가를 찾고 싶은 쪽에 가깝다고 답했다. 자신도 아직 찾는 중인데 누구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더듬거리듯 그린 그림을 걸어놓으면 사람들이 은근히 알아듣고,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이것이 미술 감상의 본질이다. 감상자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으면 작품은 산에 대고 지른 소리처럼 메아리로 돌아와 사라질 뿐이다. 감상자가 자기 언어로 무언가를 남기는 순간, 그것은 메아리가 아니라 화답하는 박자가 된다. 그 박자가 다음 작품의 동력이 되고, 그 순환이 곧 미술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소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작품은 완성된다.
골목을 벗어나 다시 대로로 나설 때, 방금 본 그림들이 남긴 어둠과 습기의 감각이 몸에 얼마간 남아 있었다. 굴 입구가 둥글고 희었듯 보름달도 둥글고 희었다는 작가의 말이 오래 남는다.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한 사람만이 밖의 빛을 그렇게 알아본다. 임서현이 우리에게 건네려는 것은 결국 그 빛일 것이다.
작가 소개 · 임서현 (Lim Seohyun)
동국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학부 시절 오래된 동굴 탐험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강원도 일대의 수직굴을 직접 탐사했고, 그때 몸으로 겪은 어둠과 공포, 그리고 그 뒤에 되살아난 삶의 열망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명상과 사주명리에 관심을 두고 자연의 순환을 오래 관찰해 왔으며, 최면을 통해 의식 아래 잠긴 기억을 살피는 등 언어와 논리 이전에 몸이 먼저 감지한 관계를 신뢰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2021년 브리즈 프라이즈를 수상했고 2025년 브리즈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인간과 동물, 식물과 광물의 경계가 서로에게 번져 드는 화면 속에서 불안과 극복, 공포와 열망 같은 양가적 감정을 신화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동굴 기도터를 비롯한 장소 리서치를 병행하며 회화의 밀도와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시 정보
전시명 · 임서현 개인전 《Dreaming Cave 지하의 기억》
기간 · 2026년 7월 17일(금) ~ 8월 1일(토)
관람 · 화요일~토요일 13:00~18:00
장소 · OMG (Ordinary Moment Gallery),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12길 8
기획 · 이지혜 (OMG 디렉터)
문의 · 010-5718-9989 / info@omg-kr.com
전시 페이지 · https://omg-kr.com/DreamingCave
※ 이 리뷰는 2026년 7월 22일 전시장에서 이루어진 작가와의 인터뷰, 이지혜 디렉터의 전시 서문, 신양희 큐레이터의 작가론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