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심층전시리뷰] 이정아 초대전 《다중적 지각의 팔림프세스트》 · 갤러리 내일
■ 색소 없는 파랑, 그리고 지하 계단
남미의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나비의 날개는 금속처럼 번쩍이는 청색으로 유명하다. 백 미터 밖 헬리콥터에서도 보인다는 그 파랑을 두고 오랫동안 사람들은 대단한 색소를 상상했다. 그러나 날개를 갈아 현미경에 올려놓으면 파란 색소는 단 한 톨도 나오지 않는다. 비늘 표면에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으로 겹겹이 쌓인 나노 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만 간섭시켜 되돌려 보내는 것뿐이다. 색이 물질이 아니라 형태에서 나오는 이 현상을 물리학은 구조색(structural color)이라 부른다.
같은 원리는 우리 곁에도 있다. 자개의 무지갯빛은 안료가 아니라 진주층을 이루는 아라고나이트 박판이 만들어내며, 묘안석(猫眼石)을 손바닥 위에서 돌릴 때 돌 속에 갇힌 빛줄기가 미끄러지듯 살아 움직이는 것도 내부의 미세 섬유가 빛을 한 방향으로 늘여 반사시키는 이방성(anisotropic) 현상이다.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정면에서 가만히 보면 죽는다는 것이다. 몸을 기울여야, 각도를 바꿔야, 빛과 눈과 표면이 특정한 삼각형을 이룰 때만 비로소 나타난다.
색이 칠해진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 그림의 진짜 저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품고 필자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내일신문 지하 2층에 자리한 갤러리 내일의 계단을 내려갔다. 7월 24일 개막한 이정아(b.1961) 작가의 초대전 《다중적 지각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of multiple perceptions)》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 결론이 제목이 되어 돌아왔다
지난해 가을, 청담동 갤러리미쉘에서 열린 이정아의 개인전 《shape+》를 보고 필자는 그 작업을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는 낱말로 요약한 바 있다. 지우고 다시 쓴 양피지처럼, 금속판 위의 그라인더 자국과 수지 레이어와 반사된 빛이 여러 겹의 시간으로 포개져 있다고 썼다. 그로부터 열 달, 이번 초대전은 그 낱말을 아예 전시명 전면에 내걸었다.
다만 제목에 한 단어가 더 붙었다. ‘다중적 지각’이다. 작년의 팔림프세스트가 화면 안에 쌓인 시간의 층이었다면, 올해의 팔림프세스트는 그 층을 읽어내는 사람의 몸에 쌓인다. 겹쳐진 것은 물감과 수지가 아니라 시선이고, 그 시선을 옮겨 다닌 감상자의 걸음이다. 감상의 주어가 작품에서 관람자로 이동한 것이다.
모르포나비의 파랑에 파란 색소가 없듯, 작가의 화면에서 우리가 보는 광휘에 해당하는 물감도 어디에도 칠해져 있지 않다. 알루미늄판을 그라인더와 샌딩머신으로 갈아낸 방향성 있는 미세 홈, 그 위에 얹힌 투명한 수지 레이어가 전부다. 작가가 만든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림이 완성되는 자리는 판 위가 아니라 판과 눈 사이의 허공이며, 그 허공을 채우는 것은 빛과 각도와 시간이다.
“회화는 창(窓)이 아니라 수면(水面)이다. 수면은 보는 자리에 따라 다른 하늘을 비춘다.”
■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이상한 몸짓을 한다
이 작업을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은 작품이 아니라 관람객을 관찰하는 것이다.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자세를 취한다. 고개를 기울인다. 두 걸음 물러선다. 다시 다가선다. 옆으로 비껴 서서 곁눈질한다. 어떤 이는 무릎을 살짝 굽혀 눈높이를 낮춘다. 르네상스 원근법이 발명된 이래 회화는 ‘하나의 고정된 눈’을 전제해왔고 우리 몸은 그 전제에 오래 길들여져 있는데, 이정아의 화면은 바로 그 정면성(frontality)을 해체한다.
생태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 J. Gibson)의 통찰이 여기서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시각 정보는 정지한 눈에 주어지지 않는다. 관찰자가 움직일 때 환경광의 배열이 변형되고, 그 변형의 패턴 자체가 정보가 된다. 본다는 것은 눈이 하는 일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이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정아의 작업은 이 명제를 회화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움직이지 않는 관람자에게 이 그림은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 작품은 악보, 관람자는 연주자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피아노 페이즈(Piano Phase)〉(1967)를 떠올린다. 두 연주자가 같은 열두 음 패턴을 치되 한 사람이 아주 조금씩 빨라진다. 그러면 악보에 적혀 있지 않은 제3의 선율이 떠오른다. 그 선율은 어느 연주자도 연주하지 않았고, 오직 두 층의 위상차와 청자의 지각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이정아의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와 같다. 금속의 반사층과 수지의 굴절층이 미세하게 어긋나 겹치고, 관람자의 이동이 그 어긋남에 속도를 부여한다. 작가가 만든 것은 패턴이고, 이미지는 그 패턴들의 위상차에서 발생한다. 작품은 악보이고 관람자는 연주자인 셈이다. 같은 전시를 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어떤 이는 수양버들을 떠올리고, 또 어떤 이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빗소리를 듣는다.
“작품은 악보이고, 관람자는 연주자다.”
■ 21세기의 나전, 빛을 담지 않고 빛을 초대하다
눈을 동양으로 돌리면 이 원리를 이미 수백 년 다뤄온 전통이 있다. 나전칠기(螺鈿漆器)다. 조선의 장인들은 광학 이론 없이 진주층의 구조색을 손끝으로 다뤘고, 옻칠의 검은 심연 위에 자개를 앉혀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나게 했다. 나전은 형광등 아래 정면에서 보면 죽는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 몸을 조금 기울여 곁눈으로 볼 때 살아난다.
그렇다면 이정아의 알루미늄 판은 21세기의 나전이라 불러도 좋겠다. 옻칠 대신 수지를, 자개 대신 갈아낸 금속을 쓰되 ‘빛을 담지 않고 빛을 초대한다’는 태도는 같다. 서구 현대미술의 포스트-매체 담론과 한국 공예의 오랜 감각이 이 지점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다. 이 만남이야말로 이번 전시가 지닌 통섭적 두께의 핵심이다.
■ 기계로 제작한 아우라 ― 벤야민의 역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소멸시킨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이정아의 작업 앞에서 이 명제는 흥미로운 역설로 뒤집힌다. 그는 산업용 그라인더와 샌딩머신, 공업용 수지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수단으로 오히려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사진에 담기지 않고, 인쇄물로 옮겨지지 않으며, 도록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지금 여기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이미지, 벤야민이 말한 ‘지금-여기’의 조건을 기계로 되살려낸 셈이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봄(vision)은 눈의 기능이 아니라 세계에 던져진 몸의 사건이다. 작가 자신이 박사논문에서 차용한 들뢰즈의 주름은, 이번 전시에서 화면 안이 아니라 관람자와 화면 사이에서 접힌다. 이론이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 각도 없는 이미지의 시대에
그러므로 이 전시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조용한 응답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미지의 절대다수는 스크린에서 소비되고, 생성형 인공지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초당 수천 장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각도가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은 언제나 정면이고, 픽셀은 우리가 고개를 기울여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정아의 작업은 그 무한 복제 체제의 바깥에 있다.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그림, 파일로 전송되지 않는 회화다. 취향과 안목이 알고리즘을 이기는 지점도 여기다. 알고리즘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계산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고개를 기울이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
“알고리즘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계산할 수 있지만, 고개를 기울이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
■ 평면을 의심해온 사십 년
이정아 작가의 이력을 필자는 ‘평면을 의심해온 시간’으로 읽는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로 석사(MFA)를 마친 그는 다시 단국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미술학 박사를 받았다. 회화의 안쪽에서 출발해 회화의 조건을 되묻는 자리까지 걸어간 경로다.
박사논문 『포스트-매체 조건과 회화의 기술적 토대에 관한 연구』에서 그는 들뢰즈의 주름 개념을 빌려, 회화가 더 이상 고정된 평면성에 머물지 않고 기계적 마모를 통해 새로운 공간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캔버스를 지우고 금속판으로 건너간 선택이 우연한 재료 실험이 아니라 십수 년에 걸친 이론적 확신의 귀결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스물네 차례가 넘는 개인전은 그 확신을 밀고 나간 횟수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그의 선택은 상업적으로 결코 유리한 쪽이 아니었다. 아트페어와 온라인 뷰잉룸이 미술 유통의 표준이 된 시대에 사진으로 옮겨지지 않는 그림을 고집한다는 것은 스스로 유통 경로를 좁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오래 지킨 끝에 이번 전시의 제목이 나왔다. ‘다중적 지각’은 이론에서 온 말이 아니라 오래 버틴 태도에서 온 말이다.
■ 마지막 한 겹은 보는 사람이 쓴다
이 전시를 찾는 이들에게 한 가지만 권하고 싶다. 감상할 때 서두르지 마시라. 마음을 건드리는 작품 하나를 골라 그 앞에서 최소한 세 번 자리를 바꿔 서보시라. 왼쪽에서 한 번, 정면에서 한 번, 눈높이를 낮춰 한 번. 세 번째쯤에서 무언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것은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든 것이다. 다중적 지각의 팔림프세스트는 그렇게 완성된다. 지우고 덧쓴 양피지의 마지막 한 겹은, 언제나 보는 사람이 쓴다. 전시는 8월 5일까지 이어지며, 7월 30일 오후 3시에는 작가와의 만남이 마련된다.
작가 소개 | 이정아 (b.196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 석사(MFA), 단국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서양화전공 미술학 박사. 박사논문 『포스트-매체 조건과 회화의 기술적 토대에 관한 연구 ― Shape+ 전의 작품을 중심으로』.
개인전 24회 이상 개최. 갤러리 내일, 갤러리미쉘, 세종뮤지엄갤러리, 갤러리밈, LOVE2ARTS GALLERY(벨기에 앤트워프) 등 국내외 주요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아트부산, 아쿠아 아트페어(마이애미), 어포더블 아트페어(벨기에) 등 국내외 아트페어에 꾸준히 참여해왔다.
제4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부문 심사위원 역임. 대한민국미술인상 문화예술상, 일본 도쿄공모전 우수상 및 초대작가상 수상.
한국미술협회 환경미술 이사, 서울미술협회·성남미술협회 회원. 세종대학교, 중국 산동소초왕식품유한공사를 비롯한 국내외 기관과 컬렉터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 정보 | EXHIBITION
전시명 : 이정아 초대전 《다중적 지각의 팔림프세스트 palimpsest of multiple perceptions》
기간 : 2026년 7월 24일(금) ~ 8월 5일(수)
오프닝 : 7월 24일(금) 오후 5시 | 작가와의 만남 : 7월 30일(목) 오후 3시
장소 : 갤러리 내일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3, 내일신문 B2)
관람 : 오전 11시 ~ 오후 6시 | 월요일 휴관 | 무료관람
문의 : 02-2287-2399 | 후원 : 내일신문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