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SC 특집 컬럼 3 최종회] 화이트월 이후의 갤러리; 연합과 공유 - 컬렉터가 작가를 후원하기 위한 조건
<컬럼 연재 목차> 제1회 무너진 사다리 - 한국 갤러리 생태계의 진단 제2회 감각의 확장 - 공간연출과 미식, 몽고트에서 뒤슬레이드 농장까지 제3회(최종회) 연합과 공유 - 컬렉터가 작가를 후원하기 위한 조건 |
네덜란드 미리암브로 갤러리의 오프닝 전경(사진출처: https://www.miriambos.com/)
제3부 연합과 공유 - 컬렉터가 작가를 후원하기 위한 조건
제2부의 제언에는 명백한 반론이 따라붙는다. 좋은 이야기지만, 그 모든 것에는 돈이 든다는 것이다. 하우저 앤 워스는 농장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갤러리이고, 프라다는 재단을 세울 수 있는 브랜드다. 임대료를 걱정하는 한국의 중소 갤러리에게 레스토랑을 만들라는 조언은 공허하다.
그래서 제3부의 제언은 개별 갤러리가 아니라 구조를 향한다. 개별형에서 연합형으로. 소유에서 공유로.
1. 공유형 수장고 - 가장 무거운 비용부터 나눈다
갤러리 운영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비생산적인 비용이 수장과 보존이다. 온습도가 관리되는 공간, 보험, 운송, 상태 조사, 아카이빙. 어느 것도 개별 갤러리가 홀로 감당하기에 효율적이지 않다.
미국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이 스미소니언 재단과 협력해 공동 수장고 'Pod 6'를 건설하고 운영 비용을 절감한 사례는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법을 보여 준다. 시설 유지비를 낮추는 동시에 소장품 관리의 전문성은 오히려 높이는 구조다.
국내에도 인프라가 준비되고 있다. 인천의 '더프리포트 서울'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구 미술품 수장고로, 관세 면제와 무역 규제 프리 지역의 이점을 활용해 국제적 거래와 보관의 허브 역할을 수행한다. 문제는 이 인프라를 개별 갤러리가 각자 협상해서는 협상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랑협회 단위, 혹은 지역 단위의 컨소시엄이 공동 계약 주체로 나설 때 비로소 규모의 경제가 발생한다.
수장 비용이 절감되면 그 여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2부에서 말한 공간연출과 감각 경험으로 가야 한다. 창고에 묶여 있던 돈을 관람객의 몸이 머무는 자리로 옮기는 것, 이것이 연합형 모델의 실질적 목적이다.
2. 컬처럴 파트너십 — 밀도를 공유한다
두 번째 연합은 프로그램의 연합이다. 아트바젤이나 엑스포 시카고가 인근 미술관, 재단, 수장고형 미술관(샤울라거 등)과 협력해 지역 예술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VIP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는 방식은 좋은 참조점이다. 하나의 갤러리가 제공할 수 있는 하루는 두 시간짜리다. 그러나 다섯 개의 공간이 연합하면 이틀짜리 여정이 만들어진다.
앞서 살펴본 성수연방의 길드 모델이 시사하는 바도 같다. 서로 다른 업태가 한 마당을 공유하며 상생하는 구조. 갤러리 단독으로 레스토랑을 짓지 못한다면, 이미 좋은 레스토랑이 있는 곳으로 가거나, 좋은 레스토랑과 계약을 맺으면 된다. 소유하지 않고 연결하는 것이 자본이 얇은 쪽의 전략이다.
3. 담론의 플랫폼 - 중립을 버릴 용기
세 번째 제언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갤러리는 더 이상 중립적인 공간일 수 없으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담론을 주도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뉴욕의 해나 트라오레 갤러리가 게릴라 걸스 전시를 통해 특정 가치관을 지지하고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적극적 행위자로 나선 사례처럼, 갤러리가 입장을 가질 때 비로소 강력한 커뮤니티가 형성된다.
커뮤니티는 취향의 동맹이다. 그리고 취향의 동맹은 중립적인 공간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지지하는지 밝히지 않는 공간에는 지지자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갤러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색깔이 있다'는 평가인데, AI 시대에는 색깔이 없는 것이 훨씬 더 치명적이다. 알고리즘이 무한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세계에서 사람이 특정 공간을 반복해서 찾는 유일한 이유는 그 공간의 편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4. 지식의 공유 - 관객을 협력자로
독일 ZKM의 <Open Codes> 전시는 미술관을 '공유지(commons)'로 정의하고 가이드 투어와 자발적 모임 공간을 활성화해 관객을 지식 생산의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관람객을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 생산자로 보는 이 관점은 컬렉터 교육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디지털 기술은 여기서 적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AI와 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관람객의 취향에 맞는 작품 정보를 제공하고(SFMOMA의 'Send Me SFMOMA'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 API를 개방해 외부 전문가와 협력하는 초연결 데이터 공간을 지향할 수 있다. 요컨대 온라인은 만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예약하고 기억하고 이어 가는 층위를 담당해야 한다.
5. 컬렉터와 후원 조직의 자리
그렇다면 한국작가후원연대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우리는 갤러리가 아니고 앞으로도 갤러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갤러리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세 가지 기능을 보완할 수는 있다.
첫째, 감상 교육이다. 미술인문 아트살롱과 컬렉터 교육 프로그램은 갤러리가 단기 매출 압박 때문에 지속하기 어려운 장기 투자다. 후원 조직이 이 부분을 맡아 갤러리와 공동으로 운영할 때, 갤러리는 판매 공간이 아니라 학습 공간으로 재정의된다.
둘째, 연합의 촉매다. 개별 갤러리끼리는 경쟁 관계이기 때문에 공동 수장고나 공동 프로그램의 협상 테이블을 스스로 차리기 어렵다. 이해관계에서 한 발 물러선 비영리 조직이 그 테이블을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기록이다. 작가의 전시 서문, 감상 기록, 컬렉션 이력을 축적하는 일은 개별 갤러리의 폐업과 함께 사라지곤 했다. 통섭적 아트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미술은 작품과 언어가 함께 순환할 때에만 시장을 이룬다. 후원 조직은 그 언어의 저장고가 되어야 한다.
6. 맺으며 - 안식처로서의 갤러리
AI 시대 오프라인 갤러리의 생존은 두 축에 달려 있다. 디지털화할 수 없는 인간적 감각의 확장, 그리고 연합을 통한 자원의 공유다. 갤러리는 작품을 파는 상점이 아니라 미식과 교육과 네트워킹이 융합된 커뮤니티형 안식처(sanctuary)로 진화해야 한다. 물리적 신체의 참여가 필수적인 이 공간들은 가상 세계가 제공할 수 없는 독점적 가치를 창출하며 새로운 미술 생태계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결론을 조금 더 개인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지난 2년간 한국작가후원연대가 만난 컬렉터들은 예외 없이 어떤 공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그림을 산 갤러리의 냄새, 작가와 마주 앉았던 테이블, 문을 열 때 들리던 소리. 그들이 미술을 사랑하게 된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작품을 만난 자리 때문이기도 했다.
작가를 후원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자리를 늘리는 일이다. 컬렉터가 태어나는 자리, 취향이 자라는 자리, 안목이 시험받는 자리. 갤러리가 건강하게 바로 선다는 것은 그 자리가 계속 열려 있다는 뜻이다. 창립 3년 차를 시작하며, 우리는 작가 곁에 서기 위해 갤러리 곁에 서기로 한다. 2027년 계획하고 있는 협력갤러리와의 전국 그림감상문 대회가 그 시작이 될 것이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