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SC 특집 컬럼 1] 화이트월 이후의 갤러리; 무너진 사다리 - 한국 갤러리 생태계의 진단
<컬럼 연재 목차> 제1회 무너진 사다리 - 한국 갤러리 생태계의 진단 제2회 감각의 확장 - 공간연출과 미식, 몽고트에서 뒤슬레이드 농장까지 제3회 연합과 공유 - 컬렉터가 작가를 후원하기 위한 조건 |
여는 글 - 우리는 왜 갤러리를 이야기하는가
한국작가후원연대(KASC)가 창립 2주년을 맞는다.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붙들어 온 질문은 하나였다. 작가는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작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답에 도달했다. 작가를 후원하려면 컬렉터가 있어야 하고, 컬렉터가 자라나려면 갤러리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컬렉터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컬렉터는 만들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길러진다. 어떤 사람이 처음 그림 앞에 서서 마음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언어로 옮겨 보려 애쓰고, 두 번째 세 번째 방문을 통해 자기 눈의 좌표를 확인하고, 마침내 지갑을 여는 그 일련의 과정 전체가 하나의 교육 과정이다. 그 교육이 일어나는 유일한 물리적 장소가 갤러리였다. 갤러리가 무너지면 컬렉터가 생기지 않고, 컬렉터가 생기지 않으면 후원은 자선이 되고, 자선이 된 후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창립 2주년 특집으로 우리는 작가가 아니라 갤러리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애정 어린 진단이자,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진단이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는 지금 한국 갤러리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냉정하게 진단한다. 제2부는 AI가 시각과 청각을 완벽히 복제해 내는 시대에 갤러리가 되찾아야 할 감각의 영역, 즉 공간연출과 미식이라는 두 개의 무기를 국내외 사례를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제3부는 개별 갤러리의 각자도생을 넘어서는 연합형 모델과, 그 안에서 컬렉터와 후원 조직이 맡아야 할 역할을 제언한다.
제1부 무너진 사다리 - 한국 갤러리 생태계의 진단
1. 유통 독점의 종말
한국 화랑 시스템은 오랫동안 하나의 사다리 위에 서 있었다. 신진 작가가 대관전으로 시작해 기획전에 초대되고, 중견 화랑의 전속이 되고, 아트페어 부스를 거쳐 미술관에 진입하는 경로. 이 사다리는 갤러리가 작가와 대중을 잇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작동했다. 독점이 있었기에 위계가 있었고, 위계가 있었기에 사다리가 있었다.
그 독점이 지금 해체되고 있다. 오늘의 작가에게는 지자체 문화재단의 창작공간과 지원 프로그램, 백화점의 아트 스페이스, 대형 갤러리 카페, 기업 미술관과 사옥 로비, 호텔과 리조트의 아트 프로젝트, 팝업 스토어, 온라인 플랫폼과 SNS 직거래, 작가 스스로 여는 오픈 스튜디오 등 다양한 대안이 열려 있다. 어떤 작가는 이제 갤러리를 거치지 않고도 첫 판매를 하고, 첫 컬렉터를 만나고, 첫 팬덤을 만든다.
이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에게는 해방이다. 문제는 이 다변화가 중소형 갤러리의 존재 근거를 정면으로 잠식한다는 데 있다. 대형 갤러리는 국제 아트페어와 해외 지점, 대형 컬렉터 네트워크라는 자기만의 해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과 기획 인력이 얇은 중소형 갤러리는 오직 유통 독점에 기대어 존재해 왔다. 독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들이 내밀 수 있는 차별적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충분한 답을 갖지 못했다.
2. 시각의 완전 복제, 그리고 감각의 인플레이션
두 번째 진단은 기술의 문제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인지 정보 가운데 시각이 약 80퍼센트, 청각이 약 13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 93퍼센트는 이미 디지털 기술에 의해 사실상 완벽하게 복제되고 시뮬레이션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는 유화의 임파스토를 재현하고, 생성형 AI는 특정 작가의 화풍을 몇 초 만에 흉내 낸다. 온라인 뷰잉룸의 이미지는 실제 전시장의 조도보다 오히려 더 균질하고 더 선명하다.
여기서 심각한 역전이 일어난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직접 찾는 행위의 기회비용이 온라인 감상의 효율을 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더 뼈아픈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는 이유가 '작품 앞에서의 의견 교환'이 아니라 '가상 공간에 업로드할 이미지의 재생산'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시장은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촬영 스튜디오가 되었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앞에 선 자기 자신을 찍으러 온다.
갤러리가 시각 정보만을 제공하는 한, 갤러리는 언제나 스마트폰 화면에 진다. 화면은 더 밝고, 더 가깝고, 더 공짜다.
갤러리의 총체적 신체 경험으로서의 진화 (사진출처: 생성형AI)
3. 화이트월의 역설 — 중립성이 무차별성이 될 때
20세기 모더니즘이 발명한 화이트큐브는 위대한 발명이었다. 흰 벽, 균일한 조도, 소거된 맥락. 작품 외의 모든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작품의 자율성을 보증하겠다는 이 이념은 미술을 종교와 장식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브라이언 오도허티가 일찍이 지적했듯, 화이트큐브의 중립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장치다. (참조: Brian O'Doherty, 『하얀 입방체 안에서: 갤러리 공간의 이데올로기(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1976/1986.)
AI 시대에 화이트큐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위험해졌다. 맥락을 모두 제거한 흰 벽은, 역설적으로 디지털 스크린과 가장 유사한 조건을 만든다. 배경이 지워진 균질한 평면 위에 이미지 한 점. 이것이야말로 화면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즉 오늘날 화이트월 갤러리는 스스로 가장 불리한 전장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조건에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매체와 경쟁하고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갤러리의 위기가 시장의 위기가 아니라 감상 경험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미술시장의 침체를 말할 때 우리는 대개 유동성과 금리, 세제와 경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는 법을 잊었다는 데 있다. 컬렉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컬렉터가 태어나는 경로가 끊어진 것이다.
4. 진단의 요약
정리하자면 한국 갤러리는 세 겹의 압력 아래 놓여 있다. 첫째, 유통 독점의 상실로 인한 구조적 압력. 둘째, 시각·청각 정보의 완전 복제로 인한 기술적 압력. 셋째, 화이트큐브라는 형식 자체가 디지털 매체와 동일한 전장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 형식적 압력. 이 세 압력은 서로를 강화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진단 안에 출구가 있다. 인간의 감각 가운데 디지털이 복제하지 못한 7퍼센트가 남아 있다.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이 감각들이 몸이라는 하나의 장에서 통합될 때 발생하는 총체적 신체 경험. 여기에 갤러리의 미래가 있다.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