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정환이(b.2002) 실을 감는 일은 길이를 부피로 바꾸는 일 || 취향의기록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최고 1,329명
어제 1,000명
오늘 1,123명
홈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 취향의기록
취향의기록 (5)

『취향의 기록』은 통섭미술 인문학자 이상민이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해 철학, 과학, 문학 등 통섭적 지식의 언어로 감상을 확장해가는 연재입니다.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동서양의 사유와 작가의 삶을 통섭적 시선으로 엮어, 회화 한 점이 건네는 정서와 통찰을 매회 새롭게 기록합니다.



[이상민의 취향의기록] 정환이(b.2002) 실을 감는 일은 길이를 부피로 바꾸는 일    네이버 구글

정환이(b.2002) (경희대 대학원 26학번 조소) 〈The Forms of Still Life〉 2026, 종이끈·스틸·석고붕대, 70×100×70cm — 실을 감는 일은 길이를 부피로 바꾸는 일 —
이상민   승인 2026.08.29 11:30
a b

a2a3f71d4d716a90fe5a008106c7dddf_1787970534_7483.jpg

  The Forms of Still Life 2026, 종이끈, 스틸, 석고붕대, 70×100×70cm

 

벽 모서리에 노란 원통이 붙어 있다. 종이끈을 촘촘히 감아 만든 두루마리다. 거기서 흑백 줄무늬가 감긴 가느다란 봉들이 뻗어 나와 바닥까지 내려오고, 그 끝에서 다시 사각의 틀을 이룬다. 벽에서 바닥으로 펼쳐진 이 구조는 삼각대 같기도 하고, 빛이 퍼져 나가는 궤적 같기도 하며, 도면에서 튀어나온 선 같기도 하다. 실체가 있는 것은 감긴 원통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선이다.

작가는 실을 반복적으로 감는 행위가 시간을 물질로 치환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을 기하학적으로도 읽고 싶다. 실을 감는다는 것은 일차원의 길이를 삼차원의 부피로 바꾸는 일이다. 수백 미터의 끈이 한 뼘짜리 원통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감긴 뒤에는 그 길이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부피만 볼 수 있고 안에 얼마나 긴 시간이 들어 있는지는 짐작할 뿐이다. 축적된 시간이 늘 그렇듯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을 조각적 구조로 드러낸다는 작가의 문장은 그러므로 은유가 아니라 형태의 사실이다.

제목이 '정물의 형태들'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정물을 영어로는 스틸 라이프, 곧 정지한 생명이라 부르고 프랑스어로는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죽은 자연이라 부른다. 같은 장르를 두고 한쪽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하고 다른 쪽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정환이가 사물의 기존 기능을 흐리게 하고 새로운 관계와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고 쓸 때, 그의 정물은 분명 영어 쪽에 서 있다. 기능을 잃은 사물이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살아 있게 되는 것.

벽에서 바닥으로 뻗어 나온 이 선들의 구조를 나는 시각 피라미드로 읽었다. 르네상스의 알베르티는 회화를 설명하며 눈에서 대상으로 뻗어 나가는 광선들이 하나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화면은 그 피라미드를 자른 단면이라고 했다. 원근법의 기초가 된 그 모형은 늘 도해로만 존재했다. 정환이의 구조물은 그 도해를 실물로 세운 것처럼 보인다. 한 점에서 시작해 퍼져 나가 바닥에서 사각의 틀로 닫히는 형태. 보이지 않는 시선의 구조를 스틸 봉으로 세워 놓은 셈이다.

봉에 감긴 흑백 줄무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선으로 감긴 줄무늬는 이발소 간판이 그러하듯 정지해 있어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선의 반복이 시선을 한 방향으로 밀기 때문이다. 감는 행위가 만들어 낸 무늬가 다시 운동의 착시를 낳는 것이니, 시간을 물질로 바꾸었더니 그 물질이 다시 운동을 흉내 내는 구조다. 재료의 선택이 주제를 두 번 실어 나른다.
석고붕대가 재료에 포함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것은 본래 부러진 뼈를 고정하기 위한 의료 재료다. 굳는 동안 형태를 붙들어 두는 것이 임무이고, 회복이 끝나면 잘라 버려진다. 조각에서 석고붕대는 임시 구조를 잡는 데 쓰이는 재료인데, 정환이는 그 임시성을 최종 형태로 남긴다. 고정하기 위한 것이 고정된 것이 되는 이 전환은, 과정을 결과로 삼는 이 작업의 태도와 정확히 겹친다.

빠르게 생성되고 소비되는 시대라는 작가의 진단은 흔한 말처럼 들리지만, 젊은 작가가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 몇 백 미터의 끈을 손으로 감았다는 사실은 흔하지 않다. 감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옮겼을 뿐이다. 효율의 반대편에서 무언가를 쌓아 본 사람만이 축적이라는 말을 자기 언어로 쓸 수 있다.

컬렉터에게 70×100×70cm의 설치 작업은 결심이 필요한 소장이다. 벽과 바닥이 함께 필요하고, 구조가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림자가 작품의 절반을 차지한다. 조명을 어디서 주느냐에 따라 바닥에 생기는 선의 그림자가 완전히 달라지므로, 설치 위치를 정할 때 작가와 상의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이런 작업을 한 점 들이면 컬렉션의 성격이 달라진다. 벽에 거는 것만 모으던 눈이 공간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0 Comments
아트인코리아 그림감상문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