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와 공간, 그리고 한 그릇의 곰탕 - <쓰임의 미학 | TABLESCAPE> 세 번째 토크쇼 – 몽고트갤러리
2026년 8월 15일 오후 두 시, 청담동 몽고트 갤러리. 하루 전은 말복이었다. 무더위가 정점을 찍고 서서히 꺾이기 시작하는
그 절기의 틈에서, 갤러리 한켠에는 회화가 걸리고 그 곁에는 도자기가 놓이고, 다시 그 옆에는 따뜻한 곰탕 한 그릇이 차려졌다. 《쓰임의 미학 | TABLESCAPE》의 세 번째 프로그램은 그렇게, 서로 다른
세 개의 손끝—화가의 붓, 디렉터의 공간, 셰프의 국자—이 하나의 테이블 위에서 만나는 자리였다.
이 프로그램에 나는 진행자로 앉았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이 세 사람을 지켜봐 온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글은 사회자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 명의
관찰자로서 남기는 감상이기도 하다.
1. 세 갈래의 감각이 한자리에 모이다
패널로는 회화 작가 김선경, 몽고트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 장은미, 그리고 명화옥을 이끄는 셰프 강동하가 함께했다. 세 사람은 얼핏
완전히 다른 직업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캔버스 위에, 한
사람은 전시 공간 안에, 한 사람은 접시 위에 자신의 감각을 옮긴다.
그러나 토크가 진행될수록 분명해진 것은, 이들 모두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사람에게 건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 김선경 — 기억을
그리는 사람
"제 작업의 특징은 제가 그리는 인물이 만화적이라는 것과, 드라마적 전개에 따른
장면을 상상하며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공상과 상상을 정말 많이 하는 편인데, 제 그림이 다른 이의 상상에 단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선경 작가는 스스로를 "아티스트"로
정의하는 방식부터 남달랐다. 예전에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예술가에 가깝다고 말한다. 기술이 아니라 발견의 감각—이 정의는 이후 이어진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가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결정적 순간은 보스턴 미술관에서 마주한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앞이었다.
"더 슬레이브 쉽(The Slave Ship)"이라는 세 단어만으로 그
시대의 역사와 인본주의, 그리고 화가의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흡수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 순간 그는 "화가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의 그림은 성장과 동경, 기억이라는 주제를 어떤 사물을 매개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 걸린 한 작품은 인상주의 이전 서양 화가들의 제작 방식을 직접 탐구한 실험작이었다. 나무 틀을 직접 짜고, 거친 린넨을 씌워 스트레칭하고, 풀을 두세 번 먹인 뒤 제소 대신 오일 그라운드를 발라 2~3주를
말리고, 조색된 물감이 아니라 안료를 직접 오일에 개어 색을 냈다. 그렇게
나온 색은 작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한다. 곁에 걸린 '돌
하우스' 연작은 인형놀이를 하는 아이와, 잘 짜여진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현대인을 병치시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묻는 작업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회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그의 통찰이었다. 조각(sculpture), 사진(photograph), 도자(ceramic)와 달리 회화와 드로잉(painting, drawing)에만
유독 '-ing'가 붙는다는 지적—그것은 그림이 보는 이의
그날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성장의 단계에 따라 계속해서 다시 해석되는 진행형의 매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는 관람객들에게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일반적인 상상을 할 뿐"이라며, 각자의
흐릿해진 기억, 분위기만 남고 디테일은 사라진 그 기억을 그림 앞에서 다시 꺼내보기를 권했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독립된 완결이 아니라 만화의 한 컷, 동화의 한 페이지처럼 연작 서사의
일부로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서 한 작품만 보게 되는 관람객을 위해,
그는 심지어 갤러리 화장실 동선에까지 연작의 다른 장면을 배치해 이야기의 연속성을 은밀하게 이어두었다고 귀띔했다.
3. 장은미 — 공간과
호흡하는 사람
"작품은 전시장에 놓이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과 공간의 맥락, 그리고 그 안에서 경험되는 일상과 만나며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장은미 디렉터가 전시를 시작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작가와의 호흡"이라고 했다. 공간을 논하기 전에 그는 먼저 작가의 탄생
서사와, 그 작품이 세상에 던지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오래 들여다본다.
그 메시지가 기획자로서 그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와 공명할 때, 비로소 공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다.
그에게 공간은 빈 그릇이 아니다. 천장의 높이, 벽의
결, 빛이 들어오는 시간까지 세밀하게 관찰한 뒤, 작품이
놓여야 할 자리와 놓이지 않아야 할 자리를 엄격히 구별하고, 공간을 하나의 공동 조력자로 대한다는 그의
말은 이번 대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같은 자리에 걸어두고 "끝났다"고 생각한 작품도, 다음 날 아침 빛이 달라지면 다시 옮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공간은
빛과 공기의 순환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호흡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정교한 재배치의 과정을 "작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라 불렀다.
몽고트 갤러리가 화이트 큐브의 통념을 벗어나 가구와 도자, 회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인 공간으로
조성된 것도 같은 철학의 연장선이다. 전시가 바뀔 때마다 공간 전체의 결이 새로 짜이고, 관람객이 이 공간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해체되고 다시 호흡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바람은, 이 갤러리를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만드는 힘이었다.
상업 갤러리의 지속가능성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뜻밖에도 『빨간 머리 앤』을 꺼내 들었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아이들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가. 그 태도에 관한 대목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 공동체가 숨 쉬는 공기의 질을 결정한다는
그의 말은,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부단히 씨름해야 하는 갤러리스트의 정직한 답변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관람객이 이 공간을 떠나며 "쓰임의 미학"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각자의 저녁 식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4. 강동하 — 온도를
다루는 사람
"명화옥은 단순히 식사의 자리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이어가는 공간입니다."
외식업 경력 20년, 청담동에서 명화옥을 연
지 2년째인 강동하 셰프의 브랜드는 철저히 한 사람, 그의
어머니에게서 출발한다. 어머니의 존함 가운데 '명(明)'과 '화(火)' 자를 따 "밝게
빛나는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는 상호부터가 그러하다. 그는
손님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의 서비스 시퀀스를 세밀하게 설계해,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먹고 갔다"는 인상을 남기고자 한다.
이 철학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온도'였다. 매장에 들어서는 손님에게 그는 60도로 데운 물수건을 건넨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에서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손을 잡아줄 때의 그 온도를 물수건으로 옮겨온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음식이 나가기도 전에 손님들이 감동하는 이유다. 매장의 실내 온도는
사계절 내내 22~23도, 습도는 50~60%로 유지된다. 곰탕은 팔팔 끓는 상태가 아니라 80~85도로 서빙되는데, 이는 미각이 온도에 지나치게 압도되지 않고
짠맛과 감칠맛, 고기의 육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
반대로 깍두기나 무말랭이 같은 반찬은 차갑게 내어 온도의 대비로 개운함을 완성한다. 하나의
그릇, 하나의 반찬에까지 스며 있는 이 '온도에 대한 집착'은, 회화에서의 붓질이나 큐레이션에서의 공간 감각과 놀랍도록 닮은
정교함이었다.
이날 준비된 메뉴는 말복 다음 날이라는 시점에 맞춰 구성된 세 가지 보양식이었다. 몽고트가
준비한 샴페인에 명화옥이 지참한 크렘 드 카시스를 더해 즉석에서 제조하는 '키르 로얄'이 웰컴 드링크로 손님들을 맞았고, 초당옥수수 감자샐러드와 매콤한
김부각이 곁들여진 작은 스몰 플레이트가 입맛을 돋웠다. 이어 전복과 문어, 부추와 표고버섯을 곰탕 육수로 편육처럼 엮어낸 요리가 감태에 싸 먹는 방식으로 제공되었고, 그 위에는 가스오부시처럼 얇게 저민 다시마가 감칠맛을 더했다. 마지막은
강동하 셰프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보양식 곰탕이었다. 풀 포션이 아닌 맛보기 형태로, 저녁엔 술 한잔의 벗이 되고 다음 날 낮엔 해장이 되는 "리사이클링"의 구조를 그는 곰탕 한 그릇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5. 세 감각이 만나는 지점
— '쓰임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토크를 마무리하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화, 공간, 음식 이 세 영역은 각기 다른 재료와 문법을 갖고 있지만, 결국
모두 '누군가에게 감각을 건네는 일'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김선경 작가는 캔버스 위에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남기고, 관람객이
그 위에 자신의 기억을 얹기를 기다린다. 장은미 디렉터는 빛과 공기가 매 순간 다르게 호흡하는 공간을
조율해, 작품이 사람의 일상과 만나는 접점을 만든다. 강동하
셰프는 물수건 한 장, 국물 한 그릇의 온도에까지 정성을 쏟아 손님의 몸에 직접 가닿는 감각을 설계한다.
'쓰임의 미학'이라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벽에 걸려 감상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쓰이고
경험되고 몸에 스밀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도자기가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믹스매치되어 개별 찬기로
쓰이고, 회화가 화장실 동선까지 이어지는 연작으로 존재하며, 곰탕
한 그릇의 온도가 감상의 방식을 결정하는 이 모든 장면들이 그 증거였다.
6. 취향과 안목 — 회화·공간·미식을 관통하는 네 가지 원리
대담을 마무리하며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취향이란 한 인간의 생애사가 응축된 결정체이며, 안목이란 그 결정체가 쌓여 마침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눈이라고. 졸저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 새로운 가치와 맥락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p.26-27)
"AI 데이터 시대의 가장 희소한 자산은 '당신의 취향'입니다." (p.22-23)
"취향은 나침반입니다. 무미건조한 데이터 속에서 내가 달려갈 방향을 결정하는 영혼의
중력입니다." (p.18-19)
이날 회화와 공간, 미식이라는 서로 다른 세 그릇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세 영역이 취향을 형성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있어 결국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람마다 선택하는 결과물(Style)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것을 감상하고 누리는 원리(Code)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7. 지속가능성, 그리고 남는 질문
상업 갤러리가 지속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묻는 질문에 장은미 디렉터가 내놓은 답 —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 — 은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유효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예술과 미식,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쓰임의 미학 | TABLESCAPE》가 계속해서 던지고자 하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쓰임의 미학 | TABLESCAPE》 PROGRAM
03 TALK SHOW*
진행 이상민(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장)
출연
김선경(Oil Painter, Claire's Atelier) · 장은미(Art Director, 몽고트 갤러리) · 강동하(Chef, 명화옥)
2026. 8. 15. (토) 14:00, 몽고트 갤러리 청담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