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언어와 공간의 언어가 만나다
청담동 몽고트 갤러리(대표 장은미)에 봄볕이 깊이 드는 주말 오후, 화가 이미향과 세라미스트 우창민의 아티스트 토크가 열렸다. 이미향의 제9회 개인전을 계기로 기획된 이번 자리는 단순한 작가 인터뷰를 넘어, 평면 회화와 도자 조명이라는 서로 다른 감각의 언어가 어떻게 한 공간에서 공명하는지를 두 작가의 육성으로 풀어내는 시간이었다.

공간이 먼저 말을 걸다 — 장은미 대표의 연출
이날의 경험은 갤러리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몽고트 갤러리를 이끄는 장은미 아트디렉터는 이번 전시에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설계했다. 이미향의 회화가 백색 벽면에 걸리고, 그 사이사이 우창민의 도자 조명들이 천장에서 내려오거나 선반 위에 자리를 잡았다. 회화가 '벽의 숲'을 이룬다면 도자는 '그 숲 사이를 흐르는 공기'였다.

장 대표는 이미향 작가의 작업을 두고 "감각의 기억이 화면 위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리듬이 관람자 각자의 기억과 어떻게 공명하는지에 주목해달라"고 전했다. 두 작가를 직접 섭외하고 창원까지 내려가 이미향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으며, 인스타그램조차 하지 않는 우창민 작가를 창고 속 작업들로부터 끄집어낸 것도 장 대표였다. "이런 작가가 계속 묻혀 있으면 안 된다"는 그의 확신이 이번 전시를 가능하게 했다.
장은미 대표가 마련한 케이터링
토크가 시작되기 전, 참석자들에게는 정성스러운 다과가 제공됐다. 섬세하게 차려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갤러리가 단순히 작품을 거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예술이 만나는 살롱임을 증명했다. 작품을 보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이 일련의 경험은 장 대표가 지향하는 갤러리 문화의 정수였다.

"삶은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유년의 안식처" — 이미향
미술인문학자 이상민은 이미향의 작업 앞에 서는 경험을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미향의 작품은 단색화의 정제된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화면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무수한 겔미디엄의 투명한 사각형 블록들, 그 아래로 아크릴 물감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낸 울퉁불퉁한 지형—이것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다. 작가는 물감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퇴적시킨다."
이날 토크에서 이미향 작가는 그 '퇴적의 시간'에 대해 직접 말했다. "저에게 삶은 풍경 너머,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안식처입니다." 경남 창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안동의 깊은 숲에서 자라며 새긴 흙의 촉감과 자연의 색변화가 작업의 뿌리라고 고백했다. 이번 전시작의 부제처럼, 그의 캔버스는 '오랜 기다림이 푸르게 물든 자리'다.
기법의 핵심은 겔미디엄과 모델링 페이스트를 혼합해 캔버스 위에 수십 겹의 레이어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상민은 이 물성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한다. "겔미디엄은 투명하지만 두께를 가진다. 그것은 내용물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보호하고, 왜곡 없이 전달하되 그 자체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이는 기억이란 것이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으로 굴절되어 재현된다는 사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souvenir pur)' 개념, 즉 과거의 특정 순간이 이미지로서 의식 속에 보존된다는 이론을 이미향의 화면과 연결짓는 시각이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최소 5~6개월이 소요된다는 작가의 말에서 이 인내의 깊이가 가늠된다. "행위는 많아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절제되고 평온해졌다"는 고백처럼, 긴 작업 시간이 역설적으로 화면의 침묵을 더 깊게 만든다.
대형 청색 회화 앞에서 이상민은 이렇게 썼다. "어린 시절 여름날 강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그 순간, 눈 위로 펼쳐진 하늘의 파란빛과 물소리와 바람의 냄새가 뒤섞여 시간이 정지한 듯한 그 충만한 고요함. 이미향의 청색 작품들은 그 감각을 정확히 되살려낸다." 추상이 구체적 형상을 제거했기 때문에 오히려 감각의 원형에 더 깊이 닿는다는 역설이다.
작품 곳곳에 빛의 각도에 따라 숨겨진 형상—이른바 '시크릿 코드'—을 발견하는 관람객들의 반응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인생에서 지나고 보면 기회가 참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두드러진 부분들은 제게 찾아온 기회들이에요." 이상민이 "수천 개의 블록이 인간이 평생 축적하는 기억의 총체적 지형도"라고 부른 것, 그 안에 작가 자신의 삶이 비밀처럼 새겨져 있는 셈이다.

"저지르고 수습하면 됩니다" — 우창민의 도자 조명 세계
"저는 그냥 자영업자라고 생각합니다." 우창민 작가의 자기소개는 담담하다 못해 도발적이었다. 공모전에서 거듭 낙선하고 스스로 모든 활동에서 발을 빼던 시기, 그는 수강생도 내보내고 협회도 탈퇴한 채 작업실에 홀로 남았다. 전시도, 홍보도, 인스타그램도 없이 묵묵히 만든 작품들이 창고에 쌓이던 그 시간이 이 자리를 만들었다.
장은미 대표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날개가 꺾인 시점에 만든 작업이 오히려 최고다. 발버둥치던 절박한 시간이 작품에 응축되어 있다." 이는 이상민이 이미향 작가론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향의 화면 앞에서 우리가 멍하니 서게 되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기억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라는 관찰처럼, 두 작가 모두 가장 내밀하고 절박한 시간이 작품의 핵심 에너지가 됐다.
우창민의 도자 조명은 흙을 빚고 소성한 뒤 안에 빛을 내장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흙 조각 사이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별의 잔상처럼 산란되는 것이 이 작업의 핵심 시각적 언어다. 이날 토크에서 공개된 제작 방식도 흥미로웠다. "가마에 들어가면 제가 컨트롤할 수 없지만, 결국 제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는 흙밖에 없더라고요. 저지르고 수습하면 됩니다." 수많은 부속을 미리 구비해두고 작품이 완성된 뒤 그에 맞는 조명 부품을 찾아 결합하는 방식으로, 도자의 우연성과 빛의 계획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업이 완성된다.
설치 당일, 조명 하나가 점등되지 않아 레일과 전선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혼자 끝까지 해결했다는 에피소드도 공개됐다. "변수가 안 생긴 적은 없지만,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짧은 말에 그의 태도 전체가 담겨 있었다.

두 언어의 조우 —재즈 위에 흐르는 침묵의 간주
이번 전시의 핵심은 협업이다. 이상민은 그 조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원색들이 격렬하게 춤추는 작품은 어린 시절 마당에서 맨발로 흙을 밟던 생생한 감각처럼 기억의 원형질을 뜨겁게 분출한다." 이 에너지가 우창민의 도자 조명이 만드는 차분하고 은은한 빛과 만날 때, 공간은 팽팽한 감각의 긴장을 품게 된다.
이미향 작가는 전시장에 작품이 처음 설치되던 날의 인상을 이렇게 전했다. "작업실에 있던 그림이 아닌 것 같았어요. 각자의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집에 가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이어 "도자의 은은한 색조가 제 캔버스의 색채 논리와 같다"고 덧붙였다. "저는 다양한 색상들을 병치하여 결국 깊이 있는 하나의 색으로 보이게 하는데, 도자의 색 역시 수많은 기다림 끝에 단단한 빛깔로 응축되어 있습니다. 흙과 색이라는 자연의 재료, 그리고 수천 번의 손질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공유하기에 두 언어는 이미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우창민 작가는 반대쪽에서 같은 감각을 전했다. "작가님 작업의 밀도를 처음 봤을 때, 스님들이 불공을 드리는 수행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제 작품이 그 공간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컸어요." 그것이 도자 패널을 최대한 위쪽으로 올려 설치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상민은 이 조화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미향의 화면에서 리듬은 음악처럼 작동한다. 반복되는 사각형의 패턴은 4/4박자의 심장 박동처럼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면서도, 색의 강약과 겔미디엄의 두께와 투명도의 변주로 즉흥적 불규칙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재즈의 구조와 닮았다." 우창민의 도자 조명은 그 재즈 위에 흐르는 침묵의 간주였다.
에필로그 — 기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자리
관람객과의 질의응답을 거쳐 토크가 마무리될 즈음, 갤러리 안에는 가볍지 않은 여운이 감돌았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내밀한 고백인 동시에 감상자 각자가 가진 내면의 숲과 산의 색을 바라보며 걷게 하는 초대장이다. 층층이 쌓인 색의 숨결 속에서 잠시 멈춰 서 보자. 빛이 겔미디엄을 통과하며 만드는 그 미묘한 굴절 속에서, 당신이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삶의 소중한 조각들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깊은 공명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은미 대표가 섬세하게 차린 공간과 식탁, 그리고 두 작가의 솔직한 육성이 더해진 이날의 아티스트 토크는, 청담의 한 갤러리에서 벌어진 조용하고 깊은 사건이었다. 회화가 기억의 지형도를 펼치고, 도자가 그 사이에서 빛을 담는 그릇이 되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엮어낸 공간의 힘—그것이 몽고트 갤러리가 이번 전시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이미향 제9회 개인전
2026.04.18 – 05.16
청담동 126-6 3층
몽고트갤러리 @mongoat_official
12–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 예약제 필수 02.543.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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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 수석전문위원 · 미술인문학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 통섭미술 비평가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