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SC 컬럼] 전시를 보지 마세요, 당신의 취향을 기록하세요
15만 명이 책 때문에 코엑스에 줄을 선 게 아니다. 그들은 ‘책을 고른 나’를 기록하러 온 것이다. 미술계는 아직도 ‘작품을 보여주는 일’에만 머물러 있다.
지난 6월 말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현장 사진을 보고 솔직히 조금 부러웠습니다. 평일 오전 7시부터 입장 줄이 늘어서고, 첫날 오전에 이미 일부 부스의 책과 굿즈가 품절되는 광경. 독서 인구는 줄고 있는데 정작 도서전은 사상 최대 인파를 기록했다는 역설 앞에서, 저는 미술계 사람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줄을 세우지 못하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도서전은 더 이상 ‘책을 파는 행사’가 아닙니다. 국내 청년층(19~29세)의 독서율은 오히려 상승했고, 그 동력은 ‘텍스트힙(Text-Hip)’이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멋이 되고, 정체성이 되고, 인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미술계가 정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여기입니다.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츠를 소비하는 나 자신이 콘텐츠가 되는 구조 말입니다.
기록이 경험을 완성한다
도서전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치는 교보생명·교보문고가 운영한 체험형 부스였습니다. 단순히 책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읽고 기록하는’ 디지털 독서 경험을 전면에 내세웠고, 참가자들이 매일 인상 깊은 문장을 기록하며 생각을 나누는 ‘같이읽기 챌린지’를 운영했습니다. 읽는 행위가 끝이 아니라, 기록하고 공유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경험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저는 이 구조를 오래전부터 제 글쓰기 안에서 실험해왔습니다. 「통섭미술 취향의 기록」 시리즈가 그것입니다. 작품을 ‘본다’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고, 그 작품이 내 안의 어떤 인문학적 경험과 충돌하고 연결되는지를 기록하는 작업. 그런데 이것이 지금까지는 저 개인의, 혹은 소수 필자의 작업으로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서전이 보여준 것은, 이 ‘기록하는 감상’을 대중 참여형 구조로 확장했을 때 얼마나 폭발적인 동력이 생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보여주는 전시에서 참여하는 전시로
해외 사례에서도 같은 신호가 읽힙니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과 아부다비 문화예술그룹이 공동 기획한 아랍에미리트 현대미술전 ‘근접한 세계(Proximities)’는 4개월간 누적 관람객 7만 5천 명 이상을 유치했는데, 전시 기간 동안 대담과 예술행사 등 대중 참여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한 점이 흥행의 한 축이었습니다. 작품을 ‘진열’하는 것과 작품 곁에서 ‘함께 말하고 쓸 자리’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설계입니다.
국내 참여형 전시 연구에서도 흥미로운 시사점이 나옵니다. 일민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참여형 전시를 분석한 한 연구는, 관람객 참여 퍼포먼스와 워크숍이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의 이해를 돕긴 했지만, 관람객들이 기존에 가졌던 ‘미술관 관람 예절’에 대한 고정관념과 참여 방식이 어긋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고 지적합니다. 즉, 참여를 만들어도 그 참여의 ‘진입 장벽’을 낮추지 못하면 흥행은커녕 혼란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도서전이 잘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누구나 5분이면 따라 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참여 동작을 설계한 것.
굿즈의 함정, 그리고 우리가 피해야 할 길
물론 도서전의 흥행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출판사들의 굿즈가 흥행의 핵심 요인으로 떠오르면서, 키링 하나를 사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구매 수량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책을 보러 온 것인지 굿즈를 사러 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 된 것입니다. 미술계가 이 흐름을 벤치마킹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참여의 장치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 공공성은 증발하고 행사는 ‘인스타용 이벤트’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작가후원연대가 준비하는 통섭미술 그림감상문 대회의 출발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스탬프든, 굿즈든, QR 아카이브든, 이 모든 장치는 결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 관람자가 자신의 언어로 작품과 작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이 작가에 대한 실질적인 후원으로 이어지는 것. 도서전의 ‘같이읽기 챌린지’가 책과 사람을 잇는 다리였다면, 우리의 감상문 대회는 작품과 사람, 그리고 작가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여름, 첫걸음을 뗍니다
이론으로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작가후원연대는 이 구상을 곧바로 현장에 옮깁니다.
🎈 KASC 취향의 지도 — 통섭미술 10인전
2026. 7. 28(화) ~ 8. 9(일) | 롯데마트 송파점 2층 엠아트센터 제2전시관
🎈 경희대 미대 설립 60주년 기념 초대특별전 〈취향의 기록 — 오늘의 작가, 내일의 컬렉션〉
2026. 9. 14(월) ~ 9. 23(수) | 경희대 서울캠퍼스 미술관 4층
이 두 전시와 연계하여, 「제1회·제2회 KASC 통섭미술 취향의기록 그림감상문대회」를 각각 개최합니다.
✍️ 제1회: 접수 2026. 7. 28 ~ 8. 9 | 시상식 8. 9(일)
✍️ 제2회: 접수 2026. 9. 14 ~ 23 | 시상식 9. 23(수)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첫 회에서 시도하고 보완한 참여 장치를, 두 번째 회에서 더 정교하게 다듬어 보려는 것입니다. 이번 도서전이 보여준 장치들 — 현장에서 즉석으로 감상을 기록하고 인쇄해주는 방식, 며칠에 걸쳐 꾸준히 기록을 이어가도록 독려하는 챌린지 구조, 완주자에게 작은 보상을 주는 스탬프 투어 형태의 동기 부여 — 을 이번 두 행사에 단계적으로 도입해볼 계획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원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장치는 ‘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일’과 ‘작가를 응원하게 만드는 일’에 복무할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미술계에 던지는 제언
지금 미술계가 겪고 있는 침체는 콘텐츠의 부족이 아닙니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은 차고 넘칩니다. 부족한 것은 관람자가 자기 경험을 남길 자리입니다. 도서전이 증명한 것처럼, 대중은 더 이상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참여하고,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 변화는 한 단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갤러리, 작가, 컬렉터,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기록하는 감상’의 문화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미술도 도서전처럼 줄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는 7월 28일 송파에서, 그리고 9월 14일 경희대 캠퍼스에서, 그 줄의 시작에 한국작가후원연대가 서 있겠습니다.
글/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상민 이사장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