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찬 고요 - 이봉규의 자작나무가 10년째 말하는 것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그림이 걸려 있지 않았다.
숲이 있었다. 자작나무는 흰색이었다.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찬 고요였다."
■ 전시장 전체가 숲이었다
전시장 전체가 숲이었다. 그림이 걸린 것이 아니라, 내가 숲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갤러리 0°C에서 열리고 있는 이봉규 작가(b.1969)의 초대전 〈Serene Grove〉. 흰 대리석 바닥과 흰 벽 위에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청록의 여름 숲, 노랑과 주황이 뒤섞인 가을 숲, 줄기들이 어깨를 맞대듯 늘어선 겨울 문턱의 숲. 벽면을 따라 이어지는 사계(四季)가 하나의 긴 호흡을 이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수료한 이봉규. 그는 2015년부터 〈Serene Grove〉 연작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희수 갤러리, AB 갤러리, 솔향갤러리를 거쳐 이번 갤러리 0°C까지, 10년 넘게 같은 제목으로 같은 숲을 다르게 그려온 작가. 그 긴 집요함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이날 비로소 조금 이해했다.
■ 압도하지 않는 자연 — 무위(無爲)의 미학
화가에게는 두 종류의 자연이 있다. 하나는 그랜드 캐니언의 절벽, 설악의 공룡능선, 터너(J.M.W. Turner)가 즐겨 그리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숭고(崇高)의 감각으로 인간을 제압하는 자연이다. 다른 하나는 소란스럽지 않게 말을 건네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자연이다.
이봉규 작가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한다. 그의 작가노트는 이 선택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웅장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을 지닌,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교감을 나누는 공간이 내가 선택한 자연이다. 그 자연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대면하는 과정이 나의 작업의 시작이다."
이것은 동양 미학의 '무위(無爲)'와 닿아 있다. 노자(老子)가 말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는 상태다. 上善若水(상선약수) —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막히면 돌아가되 결국 바다에 이른다. 이봉규가 선택한 소박한 자연은 바로 그 물의 철학을 닮아 있다.
■ 사진가의 눈, 화가의 손 — 두 매체의 통섭
이봉규의 작업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그의 이력에 있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사진가였다. 홍익대 일반대학원 사진과 수료라는 경력은 단순한 학력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시각이 형성된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이미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큰 매력이라서 대학 시절 사진 작업에 빠져있었다. 지금 작업도 사진 이미지를 해석해서 표현하는 것이니 그 기본적인 구조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회화는 손으로 그린 사진이 아니다. 사진이 포착한 순간의 진실을 회화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카메라 렌즈가 결정적 순간을 고정한다면, 붓은 그 순간을 풀어내어 시간의 층위를 더한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작나무 껍질의 검은 무늬 하나하나, 잎새 사이로 스미는 빛의 입자들 — 렌즈가 포착한 그 순간을 작가는 손으로 다시 한 번 살아있게 만든다. 사진학과 회화학의 통섭(統攝, consilience), 포착과 해석의 통섭, 순간과 지속의 통섭이 한 화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 왜 자작나무인가 — 옹이와 수직, 흰색의 철학
왜 하필 자작나무인가. 처음 화면 앞에 섰을 때, 나는 자작나무의 옹이를 생각했다. 곧게 자라기 위해 자작나무는 수많은 잔가지를 떼어내며 상처 난 옹이를 안고 성장한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 불특정한 수많은 상처를 이겨내며 성장하기에, 자작나무의 옹이는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작가는 그런 옹이를 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오프닝 현장에서 이봉규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 나무가 가진 백색의 색채와 수직으로 공간을 분할하는 매력이다. 풍경 사진을 찍다 보면 수평과 수직을 맞추려는 집착이 있는데 그 영향이 작업에도 이어진 것이리라."
자작나무의 흰 줄기들은 화면을 수직으로 분할하며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빽빽하게 늘어선 줄기들, 그 사이사이의 간격 — 비어 있는 공간들이 그림의 핵심이다. 동양 미학에서 이 빈 자리는 '마(間)'라 불린다. 노자의 '당기무, 유실지용(當其無, 有室之用)' — 방의 비어 있음이 있어야 비로소 방으로서의 쓸모가 생긴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여백이 바로 그 쓸모다. 작가는 아마도 옹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 그 옹이를 지닌 채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성장하는 자작나무의 군상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흰색을 "침묵의 색, 그러나 죽음의 침묵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충만한 침묵"이라고 했다. 이봉규의 자작나무 흰색은 정확히 그 정의 위에 있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가능성으로 충만하고, 고요한 듯하지만 생명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수직의 나무들이 만드는 리듬은 바흐(J.S. Bach)의 인벤션(Invention)과 같다. 각각의 선율이 독립적이면서도 전체로서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
좌측 <Serene Grove 26_03> 캔버스에 유화, 72.5x53cm, 2026
우상단 <Serene Grove 26_08> 캔버스에 유화, 50x100cm, 2026
우하단 <Serene Grove 26_09> 캔버스에 유화, 50x100cm, 2026
■ 사계(四季)의 변주 — 동양의 여백, 서양의 색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작나무의 흰 줄기 뒤로 사계의 변화와 같이 노랑과 주황, 산발하는 붉은색이 터져 나오는 화면이었다. 흰색의 절제 위에 색채의 축제가 겹치는 이 대비는 동양화의 여백미와 서양화의 색채감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성취다. 회화와 사진, 동양적 감수성과 서양적 기법 사이에서 10년 넘게 다듬어온 언어의 결실이다.
수관을 올려다본 시점의 작품은 이 전시에서 하나의 숨겨진 보석이었다. 하늘을 향해 열린 초록 잎들의 캐노피(canopy) — 그 화면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살짝 올라간다. 위를 올려다보는 것, 그것은 작은 명상의 제스처다.
■ 그림이 치유한다 — 은유가 아니라 생리학적 사실
"치유의 숲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곳이 화려하거나 스케일이 압도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듯 나의 작업도 그러하길 바라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 1980년대부터 연구해온 삼림욕(森林浴)은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NK세포를 활성화하고 코르티솔 수치를 낮춘다는 것을 실증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숲이 아니라 숲의 이미지와 소리만으로도 유사한 심리적 효과가 나타난다는 후속 연구들이다. 그림이 치유할 수 있다는 것 —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생리학적 사실이다.
갤러리 0°C의 대리석 바닥과 흰 벽은 이봉규의 숲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 자작나무 흰색과 갤러리 흰 벽이 호응하며 공간 자체가 숲속 빈터처럼 작동한다. 관람객은 전시장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숲 안에 있다.
"작업을 하는 과정은 나에게 또한 힐링의 시간이 되고 있다."
만드는 자가 힐링을 받는 작업은 보는 자에게도 힐링을 전달한다. 미러 뉴런(mirror neuron)의 작동이다. 그 힐링의 온도가 물감의 층위 속에 이미 기록되어 있고, 관람객은 그것을 눈으로 읽는다. 仁者樂山, 知者樂水(인자요산, 지자요수) — 고요히 서 있는 나무 앞에서는 어짐과 지혜가 함께 온다.
■ 10년의 신념 — 같은 숲을 다르게 그린다는 것
2015년 희수 갤러리, 2020년 AB 갤러리, 2024년 솔향갤러리, 그리고 2026년 갤러리 0°C. 이봉규는 10년 넘게 〈Serene Grove〉라는 같은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은 집착인가, 신념인가. 나는 신념이라고 읽는다.
그의 자작나무는 매 전시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계절이 달라지고, 시점이 달라지고, 색온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근본적인 태도 — 겸손하게, 성실하게, 소박하게 자연을 대면하는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는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단 하나의 아리아 주제로 30개의 변주를 전개하듯, 이봉규의 〈Serene Grove〉도 자작나무라는 하나의 주제가 계절과 빛과 시간의 변주를 통해 풍요로워진다.
이봉규는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그렸다. 숲은 핑계고, 그림의 진짜 주제는 태도였다. 〈Serene Grove〉는 말이 적은 사람이 건네는 위로를 닮았다. 요란하지 않고, 과하지 않으며, 그러나 오래 남는다.
갤러리를 나서며 나는 비로소 5월의 공기를 제대로 마셨다. 자작나무는 흰색이다.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찬 고요였다.
■ 전시 정보 이봉규 초대전 〈Serene Grove〉 전시 기간 2026년 5월 16일(토) — 6월 12일(금) 장 소 갤러리 0°C |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로 180 1층 관람시간 수~토 14:00–18:00 (일~화 휴관) 문 의 02-336-3050 @gallery.0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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