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과 바다가 만나는 곳, 한 화가의 내면을 걷다

홈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 전시리뷰
전시리뷰 (23)

전시Review는 동시대 전시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리뷰 콘텐츠입니다. 작품과 공간, 전시의 흐름과 맥락을 기록하며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함께 소개합니다. 단순한 관람 후기를 넘어 전시가 전달하는 의미와 감각을 함께 탐색합니다.





먹과 바다가 만나는 곳, 한 화가의 내면을 걷다    네이버 구글

김인수 개인전 《푸른숨》, 갤러리온도 2026.05.09 – 05.23 (일·월 휴무) |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7-1, 2~3층
이상민   승인 2026.05.15 19:04  |  최종 수정 2026.05.15 21:38

인사동에 자리한 갤러리온도의 계단을 오르는 순간부터 무언가 달라진다. 전시장 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공기가 다르다. 《푸른숨》. 전시 제목이 먼저 말을 건다.

'숨'은 호흡이고, '푸르다'는 것은 색채이기 이전에 살아 있음의 징표다. 새싹이 푸르고, 바다가 푸르고, 새벽 공기가 푸른 것은 그것들이 아직 소진되지 않은 생명의 에너지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김인수(b.1975) 작가가 이 제목을 선택했을 때, 그는 단순히 숲의 색을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것들이 내쉬는 숨결'이라는 존재론적 명제를 화면 앞에 세운 것이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8858_5338.jpg
김인수 작가



■ 2층 — 마음을 통과한 자연


갤러리온도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흑백의 나무 군락이 사방을 에워싼다. 침묵인데 시끄럽다. 정지해 있는데 움직인다. 이 모순의 긴장이 바로 김인수 회화의 핵심이다.

동양화에서 먹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절제의 철학이고, 여백의 언어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역설의 도구다. 그는 먹선과 먹점의 중첩이라는 고전적 방법론으로 전혀 다른 시각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의 숲은 사생된 풍경이 아니다. 마음을 통과한 자연이다. 살아 있는 에너지가 화면 전체를 관통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바로 여기서 실현된다.

선(線)은 경계가 아니라 흐름이고, 점(點)은 종착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성김과 밀도의 리듬이 교차하는 화면 안에서 정적(靜寂)은 고요함이 아니라 팽팽한 긴장으로 진동한다. 서양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눈을 전제한다. 그러나 동양의 산수화는 원래 움직이며 본다. 이동시점(移動視點), 혹은 산점투시(散點透視)다. 그의 화면에는 여러 시점에서 관찰된 장면들이 하나의 화면 위에 중첩된다. 이것은 단순한 조형적 선택이 아니라, 자아가 고정되지 않은 존재임을 시각화하는 철학적 선언이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8930_5013.jpg
<심원#4> 한지 위에 수묵, 41x53cm, 2024


수만 개의 점. 수만 번의 선. 김인수의 작업 방식은 수행(修行)에 가깝다. 붓을 드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비워 내는 과정이다. 관람자는 그 밀도 앞에서 작가가 지나온 시간의 두께를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보는 이가 아니라, 만든 이의 카타르시스가 화면을 통해 전이된다. 관람객들이 "태고의 신비로움"이나 "어머니의 품속" 같은 원초적 감각을 떠올린다고 말할 때, 그들은 작가의 수행이 만들어낸 시간의 밀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9043_6859.jpg
<심원> 한지 위에 수묵, 324x130cm, 2018



■ 3층 — 수중 유영의 기억, 붓끝에서 되살아나다


《시간의 원근법》에서 《심원》으로 옮겨가며 숲의 그림자 대신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3층으로 오르면 세계가 달라진다. 먹의 흑백이 푸른 해양의 색감으로 전환된다. 산호와 해초, 파도와 물살의 흔적이 청화(靑花)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채묵(彩墨) 필선으로 채워진 화면이 관람자를 맞는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9147_0226.jpg
<푸른숨> 한지 위에 수묵담채, 97x130.3cm, 2025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다. 3층의 신작들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김인수는 화가이기 이전에 레스큐 다이버 자격을 보유한 베테랑 스킨스쿠버다. 그는 세계 여러 바다를 직접 잠수하며 수중 풍경을 눈과 몸으로 담았다. 산호초의 결, 해초의 흔들림, 빛이 부서지는 수면 아래의 공기—그것들이 채묵 필선으로 한지 위에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숲을 걸으며 이동시점으로 쌓아 올린 2층의 작업이 육지적 수행이라면, 3층은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수중 유영의 기억이다. 몸이 먼저 기억한 바다가, 붓끝에서 그림이 된 것이다.

숲이 수직의 세계라면, 바다는 수평의 세계다. 숲이 뿌리 내리는 힘이라면, 바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바다를 그리며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을 합니다. 충분하진 않지만,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나는 시간." 이 문장 하나가 3층 전시 전체를 대변한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9251_8272.jpg
<푸른숨#4> 한지 위에 수묵담채, 130x70cm, 2026


생물학적으로도 이 연결은 우연이 아니다. 가지와 산호, 이끼와 해초, 뿌리와 심해 지형—식생과 해양 생명체가 공유하는 닮은 구조에서 작가는 자연의 근원적 문법을 발견한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consilience)'을 말할 때 서로 다른 분야가 하나의 심층 원리로 수렴한다고 했듯, 김인수의 화면 위에서도 그 수렴이 일어난다. 숲과 바다는 순환(循環)과 자생(自生)이라는 원리 앞에서 하나의 층위로 겹쳐진다.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그 오래된 지혜가, 이 작은 갤러리 3층에서 현대적 감수성으로 번역되고 있다.



■ 과감해진 여백 — 감상자를 작품 안으로 초대하다


이번 전시에서 이전 작업과 확연히 달라진 것이 있다. 색과 소재만이 아니다. 여백의 밀도다. 김인수의 신작들은 더 과감하게 비워냈다. 그 여백은 작가의 미완이 아니라, 감상자를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둔 자리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기(氣)가 흐르는 통로이자, 보는 이의 시선과 감정이 스며들어 완성되는 열린 공간이다. 김인수의 여백은 관람자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와 함께 숨 쉬어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작품은 작가가 끝낸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개입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의 화중유시(畵中有詩) 전통—그림 속에 시가 있어야 한다는 사유—의 현대적 실천이기도 하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드리히가 광활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뒷모습을 즐겨 그린 것처럼, 김인수의 숲과 바다 앞에 선 관람자도 숭고한 자연에 흡수되는 역설적 쾌감 속에 놓인다. 정지된 고요 속에서 에너지가 흐른다. 멈춘 것 같지만 살아 있다.

07147f4e60fbc26a07a599310dcdc4a4_1778839380_3867.jpg
필자와 나란히 포즈를 취한 김인수 작가



■ AI 시대, 손으로 그린 숲의 의미


생성형 AI는 오늘 이 순간에도 수백만 장의 숲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숨을 쉬지 않는다. 수행하듯 한 점 한 점 먹을 찍어 내려간 작가의 시간, 그 취약함과 정직함의 흔적은 어떤 알고리즘도 복제할 수 없다. 미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예술 감상을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으로 규정했다. 갤러리온도의 2층과 3층을 오르내리며 《푸른숨》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확히 그런 경험이다.

숲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 숲이 진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은, 누군가 그것을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순간부터다.

숲을 보러 갔다가, 나를 만나고 왔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