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래서 우리는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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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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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래서 우리는 살아진다"    네이버 구글

수오·이은미 2인전 〈움트거나 어디론가〉 오프닝을 다녀와서
이상민   승인 2026.05.13 12:31  |  최종 수정 2026.05.15 06:20



5월 12일 저녁, 서울 아트노이드178 갤러리에서 열린 오프닝 현장은 조용했지만 뜨거웠다. 전시 제목은 〈움트거나 어디론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움튼다'는 것은 땅 아래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고, '어디론가'는 아직 방향을 모른 채 걸음을 내딛는 사람의 말이다. 두 작가, 수오(본명 김지홍, b.1986)와 이은미(b.1965)는 바로 그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작업을 세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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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 작가(좌측), 이은미 작가(우측)



기획자 박겸숙이 만들어낸 자리

이 전시의 뒤에는 아트노이드178의 대표이자 전시 기획자인 박겸숙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미술 현장에서 작가들과 함께 호흡해온 사람으로, 이번 전시 서문에서 두 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실과 애도라는 삶의 중력 아래 침잠하기보다, 그 무거운 감각을 조형적 언어로 치환하며 더없이 자유로운 소생의 지평을 열어낸다."

한 마디로 이 전시는 슬픔의 전시가 아니다. 슬픔을 통과한 이후의 전시다. 박겸숙 대표의 탁월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대도 다르고 매체도 다르고 경력도 다른 두 작가를 '상실과 소생'이라는 단 하나의 축으로 엮어낸 것. 오프닝 현장에서 나는 그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몸으로 확인했다. 두 작가의 작품은 마치 서로를 위해 나란히 걸려 있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명했다. 어떤 관람객은 나란히 걸린 두 작품을 한 작가의 연작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만큼 결이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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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김지홍) — 불(火)로 새기는 마음의 고고학

수오와 나의 인연은 한국작가후원연대(KASC)의 〈너이들 2년후〉 프로그램에서 시작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작품보다 그의 눈빛을 먼저 읽었다. 확신과 긴장이 공존하는 눈빛—무엇을 하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세상에 어떻게 닿을지는 아직 떨리는 사람의 눈빛. 그 이후로 나는 그의 작업을 기다리게 되었다.

수오의 작업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재료다. 장지(壯紙), 순지(順紙), 먹, 아크릴릭, 그리고 '불(火)'. 그는 안료로만 그리지 않는다. 태우고, 지우고, 그 흔적을 남긴다. 화면의 가장자리에는 미세하게 그을린 선이 있고, 형태와 형태 사이의 경계에는 불이 지나간 자리—타다 멈춘 갈색의 경계—가 남아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불을 쓴다는 것은 결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작가 스스로 말했듯, "작업의 과정은 언제나 뜻하지 않는 대로 흘러가는 부분에서 좋아진다." 이 작업은 표현이기 이전에 일종의 내맡김(surrender)이다. 동양 오행(五行) 사유에서 물과 불은 상극이지만, 수오의 화면에서 물(안료를 녹이는)과 불(종이를 태우는)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공존한다. 대립하는 것들이 결국 하나의 흔적을 만들어낸다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오프닝에서 수오는 자신의 작업 중 가장 무겁고 솔직한 두 점을 내걸었다.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2024, 장지에 먹·불·콜라주, 116.8×91cm)이라는 제목은 심장을 찌르지만, 작품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건조하다. 먹의 점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그 사이사이를 불로 태운 가느다란 경계가 그물처럼 연결한다. 가까이서 보면 각각의 단편들이고,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반드시 종말을 향하지는 않는다. 때로 그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수오의 말처럼, 소멸을 그리면서 역설적으로 생(生)의 감각으로 귀결되는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촘촘한 점들의 밀도가 어떤 압박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것들의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작품 〈사라져 가는 것들을 위한 보편의 말들〉(2024, 116.8×91cm)에서 묵직한 원형의 형태들은 서로를 밀어내는 듯 붙어 있다. 먹의 무게감은 억눌렸으나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질량처럼 느껴진다. 슬픔은 가볍지 않다. 이 작품은 그 무게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형태는 기하학적이고 구성은 냉정하다. 감정의 밀도와 조형의 절제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것이 수오 작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수오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도 꿈을 꾼다. 해가 나기 전에 땅에 새로운 생명을 심듯 살아가기 위해 우리 안에 허무의 씨앗을 심자." 허무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씨앗으로 삼는 작가. 이것이 수오의 세계다. 그리고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수오는 이번 전시를 전후로 김창렬 '화가의 집'의 큐레이터로 합류하게 됐다. 오프닝 현장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작가가 작업만이 아니라 미술 현장의 구조 안에서도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후원자로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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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 작가의 전시 작품



이은미 —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의 회화

이은미 작가는 30여 년의 화력을 가진 작가다. 20여 회의 전시를 이어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과감한 선택을 했다. 오래된 자신의 구작(舊作)들을 해체하고, 그 위에 새로운 드로잉을 얹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한 것이다.

작가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지워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지운다. 지우는 행위 자체로는 오히려 그 기억들이 더욱 선명해지고 또렷해지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로도 힘이 있다." 오프닝 현장에서 작가는 직접 이 과정을 설명했다.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담긴 구작들을 꺼내어 흰색으로, 검정으로 덮으려 했지만—놀랍게도 지우면 지울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이 살아났다고.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려질 뿐이라는 것을,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그 자리에서 박겸숙 대표가 말했다. "지운다고 지워지지가 않죠. 가려워지는 것일 뿐이죠." 전시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은미의 작업은 언어 이전의 공간에 대한 탐구다. '남은 시간', '어두워질 때까지', '닿지는 못해도', '마른 잎'—작품 제목들은 마치 일기의 목차처럼 시간의 결을 따라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과거작을 해체하는 과정 자체를 드로잉으로 승화시키며,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이미지들이 움트도록 했다. 상처가 아닌 움틈의 신호. 그것이 이번 이은미의 드로잉이 가진 의미다.

지난 개인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을 때〉에서 내가 주목했던 이은미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을 화폭 위에 정지시키고, 관객의 내면에서 그 순간들이 다시 살아나도록 하는 것. 이번 전시에서 그 능력은 '지움과 소생'이라는 새로운 서사로 한층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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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작가의 전시 작품




두 작가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의 의미

수오와 이은미, 두 사람은 세대도 다르고 쓰는 도구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깊어지는 기억에 대하여.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박겸숙 대표는 전시 서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두 작가는 완전한 무로의 소멸을 절망이 아닌 탄생의 잠재태로 인식하는 실존적 용기를 보여준다. 상실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깊게 기억하는 방식임을, 그리고 그 기억의 토양 위에서만 우리의 삶도, 예술도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이번 전시는 보여주고자 한다."

이 문장을 오프닝 현장에서 다시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시는 결코 어둡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슬픔을 충분히 바라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빛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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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하는 수오 작가



아직 늦지 않았다 — 지금 가야 할 이유

수오·이은미 2인전 〈움트거나 어디론가〉는 5월 23일(토)까지 아트노이드178에서 계속된다. 전시 기간이 짧다. 서두르시길 권한다.

미술이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에게도 이 전시를 권하고 싶다. 복잡한 미술사적 지식이 없어도 된다. 그냥 작품 앞에 서서 제목을 한 번만 읽어보시면 된다.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앞에서, 〈나 사실은 알고 있어 네가 떠났다는 걸〉 앞에서, 〈멀어지는 시간 속 나와 너 사이의 떨어질 수 없는 마음〉 앞에서—당신은 분명 어떤 감각 하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전시가 건네는 위로다.

살면서 한번쯤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두 작가의 작품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시장을 나올 때는,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조금 더 살 만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는 2026년 5월 12일부터 23일까지, 아트노이드178(@artnoid178)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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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하는 이은미 작가



수오·이은미 2인전 〈움트거나 어디론가〉 2026. 5. 12(화) — 5. 23(토) 아트노이드178 (@artnoid178) 기획 | 박겸숙(아트노이드178 대표)


이상민 | 수석전문위원 · 미술인문학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 통섭미술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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