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것들의 찬란한 귀환 — 김미현, '렘넌트 이즈 오로라' - 이상민

홈 > 아트인코리아 ArtInKorea > 전시리뷰
전시리뷰 (23)

전시Review는 동시대 전시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리뷰 콘텐츠입니다. 작품과 공간, 전시의 흐름과 맥락을 기록하며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함께 소개합니다. 단순한 관람 후기를 넘어 전시가 전달하는 의미와 감각을 함께 탐색합니다.





버려진 것들의 찬란한 귀환 — 김미현, '렘넌트 이즈 오로라' - 이상민    네이버 구글

워커힐 빛의 시어터 라운지에서 펼쳐지는 신데렐라의 새로운 이야기
최고관리자   승인 2026.05.04 17:47


31873688_MbvQ8zpD_88abd9726a1565758fa4c687c5c7c38defd7c436.jpeg
오프닝에서 인삿말을 하는 김미현 작가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 내 빛의 시어터 라운지. 도심의 소음과 속도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이 공간에 지금,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화가 김미현(b.1984)의 개인전 '렘넌트 이즈 오로라(Remnant is Aurora)'가 그것이다.

전시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당혹스러울 수 있다. 렘넌트(Remnant)는 '나머지', '찌꺼기', '버려진 것'을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그것이 오로라(Aurora)라니. 극지에서 피어오르는 저 황홀한 빛이, 버려진 것들로부터 온다는 선언. 이 역설 안에 이번 전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속도가 앗아간 것들을 돌려주는 화가"

전시장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철학자 폴 비릴리오가 제시한 개념 하나가 떠올랐다. 피크노랩시(Pyknolepsy) — 속도가 너무 빨라 의식이 일시적으로 끊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미지들이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릴스와 쇼츠로 대표되는 초고속 미디어 환경이 정확히 그렇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장의 이미지를 소비하지만, 그중 진정으로 '본' 것이 얼마나 될까. 김미현은 바로 그 '놓친 것들'을 붙잡는 화가다. 속도가 앗아간 잔상(afterimage)들을 캔버스 위에 소환하는 것 — 그것이 이 작가가 동시대 미술에서 갖는 독보적인 좌표다.

The Moment Joy Begins, 72.7 x 72.7 cm, Oil on Linen, 2026

The Moment Joy Begins, 72.7 x 72.7 cm, Oil on Linen, 2026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지 않았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김미현 특유의 신데렐라 시리즈가 있다. 그러나 관객이 아는 그 신데렐라가 아니다.

호박 마차 대신 낡은 소형 자동차가 등장하고, 왕자 대신 작고 사랑스러운 오리가 신데렐라의 동반자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성(城)에 도착한 신데렐라는 영롱하게 빛나는 유리구두 앞에서 —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것을 신지 않기로 선택한다.

기존의 신데렐라 서사는 철저히 수동적이다. 운명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주어진 해피엔딩에 순응한다. 그러나 김미현의 신데렐라는 스스로 운전한다. 이정표를 읽고, 방향을 결정하고, 동반자를 선택한다. 통섭미술의 관점에서 이 치환들은 단순한 유머나 패러디가 아니다. 서사 구조 안에 내재된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시각적 전략이다.

유리구두 앞에서의 그 침묵이 이 전시의 핵심이다. 주어진 서사를 거부하고 새로운 여정을 택하는 것 — 그것이야말로 렘넌트가 오로라로 거듭나는 결정적 순간이다.

전시장 내 모바일 QR 코드로 안내되는 전시작품 이미지 모음

전시장 내 모바일 QR 코드로 안내되는 전시작품 이미지 모음


안개, 경계 없음의 미학

전시장을 천천히 걷다 보면 한 가지 공통된 감각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 인물의 윤곽은 배경 속으로 스며들고, 색채는 번지며, 화면 전체가 마치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아련하게 바래 있다.

이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의도된 세계관이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석사 출신인 김미현은 사실적 묘사를 충분히 구사할 수 있는 화가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경계를 지우고, 윤곽을 흐린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오히려 감각적 세부는 흐려지고, 감정의 온도만이 남는다. 사진이 순간을 포착한다면, 김미현의 그림은 순간이 남긴 것을 포착한다.

이것은 비릴리오가 말한 "속도로 인한 이미지의 재편성" 과정을 역방향으로 되감는 작업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를 붙잡아, 천천히 다시 보게 만드는 것 — "느리게 보기의 강요". 디지털 이미지 과포화의 시대에 아날로그 회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시장 내 모바일 QR 코드로 안내되는 전시작품 이미지 모음
전시장 내 모바일 QR 코드로 안내되는 전시작품 이미지 모음

렘넌트 — 네 가지 남음의 스펙트럼

전시 소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버려진 자처럼 보였지만, 결국 남은 자, 남을 자, 남는 자, 그리고 남길 자."

이 짧은 문장 안에 이번 전시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수동적으로 남겨진 존재에서 시작하여, 능동적으로 역사에 자국을 새기는 존재로 이행하는 — 렘넌트의 진화다.

서양 낭만주의 회화에도 비슷한 멜랑콜리가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그것이 체념과 수동성 위에 서 있다면, 김미현의 렘넌트는 다르다. 그의 신데렐라는 슬프지 않다.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이 '조용한 단단함'이야말로 동시대 한국 여성 서사의 맥락에서 이 작가가 갖는 미덕이다.

At te Castle of Destiny, 193.9 x 130.3 cm, Oil on Canvas, 2026

At te Castle of Destiny, 193.9 x 130.3 cm, Oil on Canvas, 2026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빛

작가 김미현은 자신의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에서 이렇게 쓴다. "평범함 속에서의 작은 빛은 가치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완전한 어둠속에서는 작은 빛조차 찬란하게 빛나듯이, 빛나는 저의 작업을 통해 일상의 어두운 이면에 작은 빛이 되어 잃어버린 길을 찾는 이정표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로라는 아무 데서나 볼 수 없다. 번잡한 도시의 빛 공해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어두운 곳, 충분히 고요한 시간에야 비로소 그 빛이 나타난다.

워커힐 빛의 시어터 라운지라는 공간의 선택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일상의 속도로부터 한 발짝 벗어난 이 장소에서, 김미현은 관객에게 피크노랩시의 일상으로부터 잠시 빠져나올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자신이 무심코 흘려보낸 렘넌트들 — 그 찬란한 오로라 — 을 마주하도록 초대한다.

31873688_jatLdGrb_1aa7dcd61dc01d6e196ac81b62436bba6029fd06.jpeg

도슨트를 맡은 양나래(좌측), 전시의 기획을 맡은 성소윤 대표(갤러리유피, 우측)

MBN 예술 오디션 프로그램 〈화100〉 출연, 가수 김종서 앨범 커버 선정, SaatchiArt을 통한 국제 컬렉터 확보, Gallery UP(대표 성소윤)와의 전략적인 기획 전시를 이어가는 김미현의 행보는, 이미 그 자체로 렘넌트에서 오로라로의 여정을 증명하고 있다.

버려진 것들이 빛이 된다. 놓친 것들이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은 것들이, 결국 가장 오래 빛난다.

'렘넌트 이즈 오로라'는 워커힐 빛의 시어터 라운지에서 7월 4일까지 진행된다.

이상민 | 수석전문위원 · 미술인문학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 통섭미술 비평가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