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알을 깬다고 믿는 당신에게 - 채단 개인전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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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알을 깬다고 믿는 당신에게 - 채단 개인전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    네이버 구글

채단 개인전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 연희동 AR갤러리(갤러리0도씨 2관), 7월 22일까지
이상민   승인 2026.07.05 01:40  |  최종 수정 2026.07.05 01:47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한 구절을 성장의 복음처럼 외우며 살아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여기, 그 신화를 뒤집는 전시가 있다. 알을 깨고 나왔다고 믿는 매일매일이 실은 또 하나의 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지난 4일 서울 연희동 AR갤러리(갤러리0도씨 2)에서 개막한 채단(b.1999)의 두 번째 개인전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가 던지는 질문이다.

파란 창틀의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면 흰 벽에 촘촘히 박힌 수백 개의 투명한 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것들이 규격의 선반 위에 도열한 광경에 필자는 반사적으로 데미언 허스트의 약장(Medicine Cabinet)을 떠올렸다. 그러나 오프닝 현장에서 30분 남짓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 자리에서 정정해야 했다. 허스트가 기성 알약을 진열해 자본과 죽음을 냉소했다면, 이 젊은 작가는 자신이 벗어놓은 하루하루의 껍질을 손수 알 속에 다시 가두었다. 냉소가 아니라 고백이었고, 진열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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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연작 앞에 선 채단 작가. 홍익대 조소과 출신으로, 레진·실리콘·회화·사운드를 오가며껍질과 그리드라는 하나의 질문을 변주해 왔다. ⓒ이상민


186일의 껍질을 달력에 걸다 - 186,

전시장의 주벽을 채운 대표작의 제목은 〈186,〉이다. 186개의 투명 레진 알, 그리고 마침표가 아닌 쉼표. 올해 1 1일부터 전시 개막일인 7 4일까지가 정확히 186일이다. 작가는 하루에 하나씩, 그날그날 자신이벗었다고 생각한 껍질들 - 바나나·복숭아·레몬의 껍질, 나무젓가락 포장지, 라면 수프 봉지, 물티슈, 초코파이와 맥심 커피의 포장 - 을 투명 레진 속에 봉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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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단, 186,, 투명 레진에 일상의 껍질, 가변 설치, 2026. 1 1일부터 7 4일까지 186일의껍질이 월요일에서 시작하는 달력의 형태로 걸려 있다. ⓒ이상민

몰드는 실제 메추리알에서 떴다. 스무 개 남짓의 메추리알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생긴 덕에, 186개의 알은 규격품이면서도 어느 하나 같지 않다. 배치가 절묘하다. 알들은 월요일에서 시작하는 일곱 개의 열, 1월부터 7월까지 이어지는 층층의 선반 - 즉 달력의 형태로 걸려 있다. 필자는 처음에 그 배치에서 냉장고의 계란 트레이를, 순서대로 상품이 밀려 나오는 자판기를 떠올렸다. 재고처럼 쌓인 나날들. 그런데 작가의 답은 더 서늘했다.

하루하루 그날의 껍질을 벗었다고 생각하는 과정들이, 사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알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의구심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 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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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부분. 과일 껍질과 과자·커피 포장지 등 하루치의껍데기들이 메추리알 형태의 투명 레진 속에 봉인돼 있다. ⓒ이상민

필자는 이 작품 앞에서 또 다른 층위를 읽었다. 레진 알 속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표들이다. 초코파이의 빨강, 맥심 모카골드의 노랑, 라면 수프 봉지의 은박. 어린 시절 던지고 놀던 유리구슬 같기도 하고, 알록달록한 알약 같기도 하다. 놀이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끝내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 -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라는 알이다. 젊은 작가의 개인적 불안에서 출발한 작업이, 감상자에게는 문명 비평의 고발장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제목 끝의 쉼표는 그래서 마침표가 될 수 없다. 187번째, 188번째 알은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가벽 틈에 쟁여진 살덩이〈한 줄이 되면 터져요〉

전시장 한가운데 세워진 두 장의 가벽 사이, 좁은 틈으로 살구빛 덩어리들이 빼곡히 끼워져 있다. 만져보면 실리콘 특유의 물컹하고 끈적한 촉감이 손끝에 남는다.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런데 그 불쾌감이야말로 이 작품의 정직한 언어다. 네모난 몰드에 눌려 네모가 되어버린 살 - 그리드에 맞춰 규격화된 채 벽과 벽 사이의 틈에 재고처럼 쟁여진 우리들의 몸이다.

사람이 다 눌려서 네모에 갇힌 모습을 담고 싶은 게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주제였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건물을 보면 그리드가 너무 잘 보이는 나라잖아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 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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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단, 〈한 줄이 되면 터져요〉, 혼합 재료, 가변 크기, 2026. 전시장 한가운데 세워진 두 장의 가벽, 그 좁은 틈으로 살구빛 실리콘 덩어리들이 빼곡히 끼워져 있다. / 우측 - 〈한 줄이 되면 터져요〉 부분. 사람의 피부를 닮은 살구빛 실리콘 큐브는 관람객이 직접 만져볼 수 있다. ⓒ이상민


제목은 테트리스와 애니팡의 규칙을 빌려온다. 한 줄이 완성되면 터져서 사라진다. 채워지는 순간이 곧 소거되는 순간이라는 게임의 역설은, 규격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의 역설이기도 하다. 현장에서는 전시 마지막 날 가벽이 열리며 살덩이들이 쏟아지는 퍼포먼스 아이디어도 오갔다. 한 줄이 되어 터지는 순간 - 그때 이 작품의 서사는 비로소 한 사이클을 완주할 것이다.

체를 쳐서, 단절하다 - GR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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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단, GRGR〉 연작 설치 전경,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26. 수십 개의 캔버스가 벽 위에서 모였다 흩어지며 그리드와 생명이 밀고 당기는 지도를 그린다. ⓒ이상민

맞은편 벽에는 초록의 작은 캔버스들이 그리드를 이루며 벽면 가득 유영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화면 전체에 미세한 격자의 요철이 도드라진다. “이거, 체 치는 망을 놓고 그린 거지요?”라는 필자의 물음에 작가는 99% 정답이라며 웃었다. 체의 망을 캔버스에 깔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뒤 망을 뜯어내면 물감이 격자의 흔적으로 남는다. 작가의 이름채단과 겹쳐 읽으면 웃음이 난다. 체를 쳐서(), 단절시킨다(). 이름이 곧 기법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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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GR〉 표면 부분. 체의 망을 뜯어낸 자리에 남은 미세한 격자 요철 위로 죽은 풀과 새로 자라는 풀이 교차한다. ⓒ이상민


제목 〈GRGR〉은 그리드(Grid)와 그래스(Grass)를 요즘 세대답게 줄여 붙인 것이다. 밝고 긴 획으로 그려진 것은 죽은 풀이고, 그 아래 어둡게 자라나는 것은 새 풀이다. 삶과 죽음의 순환마저 그리드 안에서 일어난다. 아파트의 창, 도시의 블록, 엑셀의 셀 - 자연조차 화단과 가로수 보호틀이라는 네모 안에서만 자라도록 허락된 도시에서, 풀들은 정해진 경계를 따라가다가도 이내 선을 넘어간다.

알 속에서 바깥을 보다 - 〈알 혹은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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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단, 〈알 혹은 터널〉 부분, 패널에 혼합 재료, 2026. 거친 흑색 표면에 뚫린 균열 안쪽에 거울처럼 매끈한 검은 광택이 고여 있다. ⓒ이상민


전시의 가장 조용한 벽에는 네 점의 검은 정방형 패널이 걸려 있다. 거친 흑색의 표면 한가운데 깨진 알껍질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은 유리처럼 매끈한 검은 광택이 고여 있다. 통상 우리는 알 껍질의 균열을 밖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시점은 안이다. 알 속에서, 깨진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다.

보통 알을 깨고 나가면 밖이 장밋빛이고 아름다울 것 같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계속 어둡고, 나갔는데 왜 또 막혀 있지? 이런 느낌으로 만들었어요.” - 채단

그리고 그 매끈한 검은 표면을 들여다보면, 비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얼굴이다. 알의 안팎을 가르는 것은 껍질이 아니라 나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거울이다.

눌러 담아봤자 몇 개나 들어가겠어요

전시 제목 〈몇 칸이나 들어갈까〉는 최대한 많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꽉꽉 눌러 담자는 우리 시대의 강령에 단 의구심의 각주다. “그렇게 눌러 넣어봤자 몇 개나 넣겠어요. 있는 대로 두는 게 좋지, 꼭 네모 네모로 해야 하나 싶었어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냉소적인 듯하지만 실은 다정한 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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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 전시 전경. 전시장 한가운데 세워진 가벽 틈의 〈한 줄이 되면 터져요〉를 축으로 왼쪽 벽의 〈GRGR〉 연작과 오른쪽 벽의 〈알 혹은 터널〉 연작이 마주 본다. ⓒ이상민


채단의 작업이 미더운 것은 이 주제가 하루아침의 착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3년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13.1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알껍질파쇄기(破碎期)》에서 작가는 바닥에 석고 알껍질을 깔아 관람객이 밟을 때마다 파쇄음이 나게 하고, 진입이 막힌 안쪽 방에서는 인기척의 소리가 흘러나오게 했다. 내 세계를 깨고 나가야 비로소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운드 설치였다. 그로부터 3, 작가는깨고 나감의 서사에서깨고 나가도 여전히 갇혀 있음의 서사로 한 겹 더 깊어졌다. 조소를 전공한 손으로 레진과 실리콘과 회화와 사운드를 오가며 하나의 질문을 매체를 바꿔가며 집요하게 변주하는 태도 - 이것이 이 작가의 근력이다.

전시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매일 껍질을 벗는다고 믿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186번째 알 속에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투명한 레진처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이 하는 일이다. 알 속에서라도 달력을 만드는 사람은, 언젠가 그 달력의 어느 칸에서 껍질 바깥의 빛을 만날 것이다. 187번째 알이 벌써 궁금하다


채단 작가는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로, 일상에서 벗겨지고 버려지는 껍질들과 현대 사회의 규격화된 그리드를 소재로 삼아 레진, 실리콘, 회화, 사운드 설치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알을 깨고 나왔다고 믿지만 여전히 갇혀 있는’ 현대인의 조건이라는 하나의 질문을, 매체를 바꿔가며 집요하게 변주해 온 것이 작가의 궤적이다. 그 출발점은 2023년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13.1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알껍질파쇄기(破碎期)》였다. 관람객이 바닥의 석고 알껍질을 밟으며 파쇄음을 만들어내는 이 사운드 설치로 자기 세계의 껍질을 깨는 경험을 다룬 작가는, 3년 만의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AR갤러리, 갤러리0도씨 2관)에서 그 서사를 ‘깨고 나가도 여전히 갇혀 있음’이라는 한 겹 더 깊은 층위로 밀고 나갔다. 학부 시절인 2022년 런던 킹스턴 스쿨 오브 아트의 The Swan Space에서 열린 《Making and Showing》을 시작으로, 2023년 성곡미술관의 《On Boarding 展》과 ARTSPACE AT의 《가을사생 2023》, 2024년 아크원갤러리의 《Wish You Well: 수용성 사랑》, 2025년 모크캠프의 《MOCK camp 12기: NEXT TURN》, 그리고 2026년 NJ 갤러리의 《(IN)VISIBLE FRAMES》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단체전에 꾸준히 참여하며 자신의 언어를 다듬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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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열리고 있는 연희동 AR갤러리(AR Creator Space, 갤러리0도씨 2) 외관. ⓒ이상민

전시 정보

채단 개인전 《몇 칸이나 들어갈까 CUBIC WORLD

기간  2026. 7. 4() ~ 7. 22()

장소  AR갤러리(갤러리0도씨 2),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33 34, 1 2

관람  ~ 14:00~18:00 (~화 휴무) | 그 외 시간 관람 문의 02-336-3050

필자 소개

이상민은 미술인문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로,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과 전략기획 컨설팅펌 이노바랩() 대표를 맡고 있다. 미술감상에 통섭적 아트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도입한 『통섭미술관기행』 『통섭미술 취향의기록』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등 통섭미술 시리즈를 저술했으며, 대학 평생교육원과 갤러리에서 미술인문학 강의와 아트살롱을 열어 컬렉터를 발굴하는 등 미술감상 교육과 전시기획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인스타그램 @iartn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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