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에서 영원을 보다 - 권순익, 상하이 춘미술관
(중국 상하이 현지 취재 = 이상민)
상하이 황푸구 푸저우로 655호, 춘미술관(春美術館)의 화이트월 사이로 권순익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2026년 6월 18일 개막해 7월 1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 《시간의 틈(時間的縫隙)-권순익 개인전》은 단순한 해외 진출 전시가 아니다. 춘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으로 해외 작가에게 단독 전시장을 내준 사례이며, 권순익 개인으로서도 중국 본토에서 갖는 첫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이중의 기록을 세운 자리다. 약 4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이 전시장 전체를 채우고 있는 광경을 직접 마주하니, 이 전시가 단순한 '소개전'의 차원을 넘어 작가의 30여 년 작업 궤적을 압축해 보여주는 회고적 구성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틈'의 서사
전시장 도면을 펼쳐보면 의외로 동선이 단순하지 않다. 중앙의 원형 홀을 중심으로 좌우 회랑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길들이 다시 작은 전시실들로 이어지는 구조다. 전시장 입구 정면에는 〈무아의 환상의 소멸〉 연작 4점이 정사각 그리드로 걸려 있어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원형 홀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틈-적∙연〉 연작은 전시의 본체에 해당한다. 원형 전시장의 거의 모든 벽면을 점유한 이 시리즈는 2025~2026년 사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신작들로, 사이즈와 색조가 조금씩 다른 캔버스들이 마치 호흡하듯 리듬을 만들며 이어진다. 작품 곁을 천천히 따라 걷다 보면, 색면과 색면이 맞붙으면서도 결코 완전히 섞이지 않는 좁은 틈이 매번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틈을 메운 흑연이 빛의 각도에 따라 은은한 광택을 내는 모습은, 사진 도판으로 볼 때보다 실물 앞에 섰을 때 훨씬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배치 자체가 이번 전시의 메시지를 압축한다고 본다. 과거(붉음)와 미래(푸름)가 한 화면 안에서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의 흰 틈이 곧 '현재'라는 권순익 예술론의 핵심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전시장 후반부, 계단실을 사이에 두고 갈라지는 안쪽 공간에는 선 시리즈와 무아 시리즈가 배치돼 있다. 이 구역은 신작 중심의 앞쪽 공간과 대비되며, 권순익이 구상적 형상에서 추상으로, 다시 무아(無我)의 점·선·면으로 변모해 온 과정을 거꾸로 되짚어보는 듀얼한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흑연, 탄광촌의 기억이 빚어낸 물질의 언어
권순익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작업의 정신적 뿌리는 탄광촌으로 알려진 문경에 있다고 전해진다. 전시 텍스트는 그가 사용하는 천연 흑연을 두고 “수백만 년에 걸쳐 압력과 열로 형성된 물질”이라 설명하며, 어둡지만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나는 흑연의 물성이 시간의 축적 그 자체를 체현한다고 풀이한다. 실제로 권순익은 필자와의 지난 인터뷰에서, 탄광촌 인근에서 자라며 석탄이 발하는 검은 광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경험을 언급한 바 있다. 그에게 흑연을 문지르고 광택을 내는 반복 행위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일종의 수행이며, 옛 문헌에 나오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는 경구처럼, 반복적 노동이 거꾸로 작가 자신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2012년 이후 본격화된 〈무아의 환상의 소멸〉 연작에서는 이 흑연의 물성이 점(點)의 형태로 응축된다. 무수한 돌출 점을 찍고, 그 위에 검은 안료를 올린 뒤 다시 흑연으로 문질러 광을 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명상적 노동을 수행한다고 밝힌다. 원은 하늘, 사각은 땅, 삼각은 사람을 상징한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 이 기하학적 반복이 동양적 우주론과 만나는 지점이 선명해진다. 한 평론가가 이 연작을 두고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힘”이라 평했다는 기록 역시, 절제된 반복 속에서 오히려 강한 정서적 밀도가 발생한다는 역설을 짚은 것으로 읽힌다.
“틈은 영원으로 가는 문이다” - 작가의 말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핵심 개념인 'Interstice'에 대해, 권순익은 한국어 '틈'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랜 고민을 거쳤다고 토로한다. '갭(gap)'이나 '보이드(void)' 같은 단어 대신 'interstice'를 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 단어가 바위 속에서 생겨나는 균열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공간과는 다른 결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틈'은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만을 쫓으며 현재를 희생하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과거와 미래가 결국 한 몸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이 개념이 탄생한 계기로 그는 2007년 아프리카 여행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렸던 일화를 들었다. 새로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그 순간, 오쇼 라즈니쉬의 책 한 구절 -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틈이 있고, 그것이 곧 현재라는 문장이 깊이 각인되었다고 한다. 카메라 없이 책의 여백에 스케치를 이어가던 그 경험이, 이후 '틈' 연작 전체를 떠받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시장에서 그 드로잉 노트가 별도의 섹션에서 원작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색면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틈을 두고, 단순한 상처의 의미보다는 시간적·공간적 개념에 더 가깝다고 강조하며,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흉터 문신처럼 그 틈 자체가 양쪽에서 서로를 치유하며 흑연의 광택으로 다시 채워지는 '시간의 흔적'이라고 설명한다.
단색화 이후, 그러나 단색화와는 다른 길
중국 춘미술관의 권순익 개인전 전시 서문은 권순익의 작업을 한국 단색화의 정신, 그리고 공간주의(Spatialism)의 공간적 탐구와 연결지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귀결된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전시장을 둘러보며 받은 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색화가 갖는 반복과 절제의 미학을 공유하면서도, 권순익의 화면은 색면과 색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구성적 긴장,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흑연의 입체적 광택을 통해 회화이면서 동시에 부조에 가까운 촉각성을 획득한다. 평면 회화이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표면의 질감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점은, 단색화 계열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권순익만의 조형적 개성이라 할 수 있다.
8월 말 화이트스톤 개인전, 그리고 신간 《틈에서 빛으로》에 거는 기대
상하이 전시가 채 막을 내리기도 전에, 권순익의 다음 일정은 이미 한국에서 예정되어 있다. 8월 말 서울 후암동 화이트스톤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은 이번 춘미술관 전시에서 확인된 '틈' 연작의 최신 성과를 국내 관객에게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화이트스톤 타이베이에서 열린 《Interstice of Time: Soonik KWON at Present》가 색과 흑연이라는 두 이질적 매체의 충돌과 화합을 다룬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사유를 폭넓게 소개한 바 있는데, 서울에서의 전시는 그 연장선 위에서 더 깊어진 작업들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함께 발간을 앞두고 있는 권순익의 그림에세이 《틈에서 빛으로(From the Interstice, Into the Light)》는 이번 상하이 전시의 의미를 한층 더 묵직하게 만든다. 붉은 색면과 흑색 지평선이 맞닿은 표지 이미지부터가 이미 '틈' 연작의 조형 문법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어, 이 책이 단순한 작품집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사유를 글로 풀어낸 또 하나의 '틈'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림과 글이 함께 가는 에세이 형식은, 작가가 인터뷰에서 누차 강조했던 “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결국 하나의 몸”이라는 명제를 독자에게 직접 들려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매체이기도 하다.
상하이에서 시작해 서울로 이어지는 이번 일련의 흐름 - 중국 첫 개인전, 그리고 신간 출간과 함께 맞이할 화이트스톤 개인전은 권순익이라는 작가가 한국 추상미술의 한 갈래를 국제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과정으로 읽힌다. 춘미술관의 흰 벽 사이를 가득 채운 검은 광택의 틈들을 바라보며, 그 틈이 곧 빛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되는 순간을 8월의 서울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길 기대한다.
이 기사는 2026년 6월 23일 상하이 춘미술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글쓴이 소개
이상민은 미술인문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다. 수학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으며, 전략기획 컨설팅펌 이노바랩(주)을 경영하고 있다. 미술품 컬렉팅과 더불어 비영리단체 한국작가후원연대(Korea Artist Sponsor Club) 보딩멤버 겸 이사장으로 예술가 후원과 문화 생태계 구축에 힘쓰고 있다. 미술감상에 통섭적 아트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도입하여 <통섭미술관기행> <통섭미술 취향의기록>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등 통섭미술 시리즈를 저술했으며, 최근에는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통섭과 협업 AI 이후 인간의 전략> 등 리더십·경제경영서 시리즈를 출간했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의 미술인문학 강의와 갤러리의 미술인문 아트살롱을 통해 컬렉터를 발굴하는 등 미술감상 교육에 매진하고 있으며,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등 예술인 단체의 기획이사로, 여러 갤러리·단체와 함께 전시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