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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34)

전시Review는 동시대 전시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리뷰 콘텐츠입니다. 작품과 공간, 전시의 흐름과 맥락을 기록하며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함께 소개합니다. 단순한 관람 후기를 넘어 전시가 전달하는 의미와 감각을 함께 탐색합니다.





경지연 개인전 - Floating Everscape 떠도는 시간의 지형    네이버 구글

빛이 없을 때도 빛을 머금고 있는 형광처럼, 떠도는 시간의 지형 위에서도 우리는 이미 제자리에 있다. 이전 전시가 '어디로 가는가'를 물었다면, 이번 전시는 '지금 여기에 무엇이 동시에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형광은 빛을 흡수하여 다른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경지연의 캔버스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꽉 찬 화면이 일방향의 소통이었다면, 숲 한가운데 놓인 빨간 의자는 감상자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픽토어가 숲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했듯,
이상민   승인 2026.06.19 07:34  |  최종 수정 2026.06.1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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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머금은 시간의 지형도 - Soulscape에서 Floating Everscape로

작년 이맘때, 나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경지연 작가의 Soulscape 전시 앞에 서서 이렇게 썼다. "경 작가는 마치 누에나 거미가 비단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화려한 색과 꿈틀거리는 선을 뽑아내어 작가만의 삶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기 전, 나는 그의 좁은 작업실을 찾았다. 10평이 채 안 되는 원룸 거실에서 100호짜리 캔버스 서너 점을 간신히 꺼내놓고 설명하던 그 자리에서, 나는 이미 다음 시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침 조찬을 마치고 양재에서 안양까지 달려온 오늘, 그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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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연 작가


Soulscape에서 Floating Everscape로 — 무엇이 달라졌는가

Soulscape에서 경지연은 "관람자가 아닌 체험자로서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적인 모습과 마주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조감(鳥瞰)의 시선이었다. 영혼의 풍경을 탐색하는 유목민의 여행. 구글 어스로 실제로 발 딛기 힘든 골목까지 찾아다니던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도 그렇게 세계를 순례했다.


그런데 이번 Floating Everscape에서 작가는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작가노트의 첫 문장이 그것을 말한다. 호주 원주민 Aboriginal People의 두 겹 시간 —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꿈의 시간 'Dreamtime'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상의 순환적 시간. 이전 전시가 "어디로 가는가"를 물었다면, 이번 전시는 "지금 여기에 무엇이 동시에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유목에서 정주(定住)로의 이동이 아니라, 떠돎과 머묾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간의 지형도. 제목의 'Everscape'가 단순한 풍경(Scape)이 아닌 '영원히 지속되는(Ever)' 지형임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Soulscape에서 나는 마르케스를 빌려 이렇게 썼다. "삶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만들어지는 것, 즉 내러티브다." 그 내러티브가 이번에는 선(線)과 색(色)만이 아닌 사물(物)의 언어를 얻었다. 오브제가 등장했다는 것, 그것이 이번 전시가 이전과 가장 결정적으로 달라진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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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온유갤러리 전시장 전경       


보이지 않는 빛을 가시광선으로 — 형광 안료의 과학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재료에 있다. 경지연 작가는 이번 연작 전체를 '형광색(Fluorescent Color)만으로' 구성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화이트부터 마젠타, 청록까지, 팔레트 위의 모든 색이 형광 계열이다.


형광 물질은 특별한 화학 구조를 지닌다. 자외선이나 단파장의 빛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그보다 파장이 긴 가시광선으로 변환하여 방출한다. 이것이 형광(螢光, fluorescence)의 원리다. 반사(reflection)가 들어온 빛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면, 형광은 빛을 흡수하여 다른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광 물질은 주변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에너지를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화면에 쌓아 올린 4겹의 레이어가 이 원리 위에 서 있다. 화이트 드로잉 위에 일본산 형광 화이트 입자를 미디엄과 혼합해 올리고, 다시 그 위에 형광 컬러를 입혔다. 캔버스 표면에 숨어 있는 그 미세한 알갱이들은 조명이 닿는 순간 스스로 발광한다. 작가의 말이 정확하다. "형광 물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흡수해서 가시광선으로 방출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미 화학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작가는 그 화학 작용을 회화의 방법론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주목할 것은 블랙의 처리다. 골든 아크릴 블랙은 광(光)이 돌아 번쩍거리는 성질이 있다. 작가는 이것을 매트한 과슈와 혼합하여 원하는 깊이의 검정을 만들어냈다. 빛을 99% 이상 차단한다는 뮤소 블랙(Musou Black)도 검토했지만, 긁힘에 취약하고 바니시 처리를 하면 차단율이 떨어지는 현실적 한계 앞에서 포기했다. 형광의 극적인 발광과 그것을 받쳐주는 심연 같은 블랙. 이 대비가 이번 전시의 시각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빛이 없을 때 블랙 속에 잠들어 있던 마젠타가, 조명이 닿는 순간 선명하게 깨어나는 장면은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니라 작가노트의 핵심 테제 —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는 빛" — 의 물질적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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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온유갤러리 전시장 전경  



픽토어의 숲 #202601 — 의자가 걸어 들어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압도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120호 세 폭이 연작으로 이어지는 대형 화면. 이전 전시 Soulscape의 화면은 꽉 차 있었다. 꿈틀거리는 선과 형광색이 캔버스의 숨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당시 그 빽빽함 앞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감상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보는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픽토어의 숲 #202601〉에서 그 허전함이 마침내 채워졌다.

제목의 '픽토어(Piktor)'는 헤르만 헤세의 단편 픽토어의 변신에서 가져왔다. 행복을 찾아 천국의 숲을 헤매는 화가 픽토어가 나무로, 돌로, 새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그 이야기. 경지연은 2022년 전시 〈모습을 바꾸는 존재들〉에서 이미 이 모티프를 다룬 바 있다. 당시 그는 "이 시리즈가 언젠가는 내가 이어져 나가는 시리즈의 모태가 될 거다"라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그 예감이 4년 만에 〈픽토어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화면에는 나무 뿌리와 가지가 얽히고 꿈틀거리는 숲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 숲 한가운데 불현듯 빨간 의자가 놓여 있다. 작가가 몇 년 전 이사하면서 직접 고른 이탈리아 브랜드의 폴리카보네이트 의자다. 딱딱하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의자를 처음 본 순간 작가는 "이건 내 거야"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소유의 감각이 아니라 존재의 동일시였다. 일상의 사물과 숲의 에너지가 하나의 화면 위에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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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토어의#202601,

193.9× 390.9, ac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canvas, 2026      


의자는 인류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좌(王座)는 신성과 권위의 표상이었다.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과 지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의자의 상징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의자를 '도구 존재(Zeug)'의 전형으로 보았다. 우리가 앉을 때 의자는 투명하게 사라지고, 우리는 의자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다. 의자는 우리를 공간에 정박시키는 동시에, 그 정박 위에서 우리의 사유를 떠돌게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순간이야말로 섬이 된다는 말이 그 때문에 성립한다.


경지연의 빨간 의자는 그 모든 상징성을 품으면서, 동시에 감상자에게 초대장을 내민다. 내가 현장에서 작가에게 말했다. "여태까지 꽉 차 있는데 왠지 허전한 걸 느꼈었거든요. 오브제가 들어옴으로 인해 그 허전한 게 채워지는 거예요. 빽빽한 화면이 일방향적 소통이라면, 오브제가 있으니까 이건 쌍방향 소통이에요. 내가 들어갈 곳이 있고, 앉아 있을 곳이 있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거예요." 


의자는 다음 전시에서 버스가 될 수도 있고, 여행 가방이 될 수도 있고,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의자라는 특정 사물이 아니라, 감상자가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픽토어가 숲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했듯, 경지연의 화면도 이제 변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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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서사#202601, 

200 × 400, ac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canvas, 2026



차가운 서사 #202601 — 온도의 역설

꽃잎들이 겹겹이 쌓여 숲을 이루고, 그 위로 빙하 조각이 부유하며, 설산이 배경을 이룬다. 차갑고 장엄한 자연의 문법이 형광색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제목은 '차가운 서사'다. 그러나 그림 앞에 서면 차갑지 않다. 오히려 포근하고 통통하며 안정되어 있다. 내가 작가에게 말했다. "차갑지 않아요. 오히려 포근해요." 작가가 웃으며 답했다. "차갑게는 잘 못 그리는 것 같더라고요. 이게 저의 모습인 것 같아요." 조지 오 키프(Georgia O'Keeffe)처럼 꽃을 어마어마하게 키워 산처럼 만들어놓은 그 덩어리는, 흘러내릴 것 같으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중간 지점에 있다. 차가운 사실(설산, 빙하)과 뜨거운 에너지(형광, 꿈틀거리는 선)가 동일한 화면 위에서 팽팽히 공존한다. 이것이 작가노트가 말하는 "차가운 사실과 뜨거운 환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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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유갤러리 전시장 전경


온유갤러리라는 공간에 대하여

온유갤러리는 개관 14년 된 공간이고, 경지연은 127번째 초대 작가다. 지하 공간임에도 조명과 벽면의 비례가 정확히 맞아 작품들이 제 에너지를 온전히 발산한다. 안양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서울 사람들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4호선 인덕원역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서울 도봉산이나 수유리보다 가까운 그 공간이 서울의 어느 갤러리에도 뒤지지 않는 깊이를 품고 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 무료 관람이다.


Soulscape에서 나는 이렇게 끝맺었다. "이야기꾼인 작가가 들려주는 마법적인 스토리는 몽상가인 우리들에게 실제의 나를 만나게 해줄뿐더러 나만의 마콘도(Macondo)로 데려다줄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 마콘도에 도착한 이후의 이야기다. 빛이 없을 때도 빛을 머금고 있는 형광처럼, 떠도는 시간의 지형 위에서도 우리는 이미 제자리에 있다. 경지연의 빨간 의자에 앉아, 픽토어의 숲 한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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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연 작가(우측)와 필자(좌측)

 

경지연 Kyung Jiyeon

1999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동 대학원 서양화학과를 마쳤다. 2002년 첫 개인전 〈선, 이중색과 겹침의 모아레(moire)〉(갤러리 보다)를 시작으로 2026년 현재까지 20여 회의 개인전을 이어오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Magical Landscape〉 시리즈(2008~2010), 〈portray magic〉 시리즈(2014~2020), 〈모습을 바꾸는 존재들〉(2022, 예술공간 트라이보울·갤러리AG7), 〈환상의 그림지도〉(2024, ART BEYOND 공공미술프로젝트), 〈Soulscape〉(2025, 인천아트플랫폼)가 있으며, 이번 〈Floating Everscape — 떠도는 시간의 지형〉(2026, 온유갤러리)은 그 연장선 위의 새로운 시즌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2016·2017·2022), 충주시립미술관(2024), 포스코, 대림건설, 기업은행, 한국화이자제약, 위즈돔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07년 중앙미술대전 올해의 선정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일반지원 공모(2025), 예술창작지원사업 공모(2023), 예술표현활동 지원사업 공모(2022), 전시지원사업 공모(2010) 등 다수의 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 현재 중앙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전공에 출강하고 있다.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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