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지 《Too Sunny》 사물의 찰나, 일상의 사적인 순간을 스틸 컷으로 포착하는 회화
너무 맑은 날, 우리는 대개 그냥 지나친다. 빛이 너무 강해 사물은 선명하지만 직시할 수 없고, 순간은 아름답지만 붙잡을 수 없다. 정이지의 《Too Sunny》는 바로 그 지나쳐버린 것들을 회화로 소환하는 전시다. 정이지는 사라지기 전의 것들을 붙잡는다. 체리 하나, 레몬 하나, 두 개의 유리잔 —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그는 그 순간 앞에 멈춰 서서 붓을 든다. 곁을 지키는 것들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이처럼 작고 사적이고 일상적인 형상 속에 깃들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 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십시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남긴 이 문장은 처음엔 작가에 대한 권고처럼 읽힌다. 그러나 정이지(b.1994)의 그림 앞에 서면 다르게 들린다. 영향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것, 그래서 오히려 가능해지는 것 -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정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붓을 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감각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2026년 5월 29일부터 6월 27일까지 갤러리 콤플렉스 3·4층에 걸쳐 열리는 개인전 《Too Sunny》는 세 번째 개인전이자 지금까지의 작업을 가장 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놓은 자리다. 레몬 하나, 체리 하나, 두 개의 유리잔, 누군가의 뒷머리, 음료를 쥔 손, 그리고 눈 - 가장 사소하고 친밀한 찰나의 형상들이 두 개 층의 공간을 채운다. 전시 제목 《Too Sunny》는 역설적이다. 너무 맑다는 것은 눈이 부셔서 오히려 직시할 수 없는 상태다. 정이지의 회화가 포착하는 것이 정확히 그 순간이다.
1. 스틸 컷의 회화학 - 자르고, 일치화하고, 비로소 그린다
정이지의 작업은 스냅 사진이나 드로잉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주변 사람들의 내면에서 자신과 같은 부분을 발견하는 찰나의 느낌을 빠르게 기록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편집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사용할 땐 화면을 확대해 대상을 끌어당기고, 보고 싶은 화면의 주제와 구도가 부각되는 장면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렌즈가 대상과 함께 비추던 배경의 갖은 형태와 색은 대거 소거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자르고(crop)', '일치화'한다고 표현한다. 여과한 화면은 스마트폰 내에서 재차 크롭 되며 작가가 보고 듣고 말고 만졌던 장면을 닮아간다. 대상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의 생김, 걸러낸 화면 속 가장 그리고 싶은 미세한 지점을 연거푸 파고드는 동안 카메라가 기록한 원근과 입체감은 상당 부분 탈각되고, 남겨진 이미지는 점차 편평해진다. 이 편평함은 결함이 아니라 회화의 조건이 된다.
그의 그림은 청춘 영화의 스틸 컷을 닮았다. 인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머리만 화면을 채우고(《Dazzling》), 손가락이 컵을 감싸 쥔 순간만 잘려나오며(《Lemonade》), 눈 하나가 캔버스 전면을 점령한다(《Fin.》). 그러나 결과는 결코 사진이 아니다. 경쾌하고 단단한 붓터치, 배경의 과감한 생략, 물감의 농도를 조절해 번지거나 맺히게 한 흔적들 — '각각의 장면이 꼭 그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언어가 아니라 그리기 방식으로만 설득된다. 이것이 정이지가 작가노트에서 직접 밝힌, 회화가 사진 위에서 가능한 자리다.
▲ 《Fin.》(2026), oil on canvas, 32×32cm - 눈 하나가 캔버스 전면을 점령한다. 확대와 크롭이 반복된 결과, 인물의 정체보다 '보는 행위' 자체가 전면화된다.
— — —
2. 정물은 관계의 은유다 — 사물 안에 깃든 사람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정물화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Cherry Red》, 《Lemon Yellow》, 《Snow White》, 그리고 전시 제목과 동명의 《Too Sunny》. 체리 하나, 레몬 하나, 둥근 구(球)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유리잔. 이 소박한 목록이 전시의 핵심 어휘를 구성한다.
정이지에게 정물은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직접 고백한다. '정물이나 풍경을 그리는데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이 나에게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 혹은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형상은 사물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테라코타빛 배경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빈 유리잔(《Too Sunny》)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둘이 함께였던 어느 오후의 은유다. 잔은 비어 있지만 온기는 남아 있다. 회색빛 화면 속 홀로 빛나는 구체(《Snow White》)는 계절의 끝에 서 있는 누군가의 침묵처럼 읽힌다. 강렬한 노란 레몬 하나(《Lemon Yellow》)는 찬란하지만 시고 쓴, 정이지가 전작 《My Salad Days》(2022, 상업화랑)에서 탐구했던 '청춘의 맛'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처럼 정이지의 정물화는 전통적인 정물화의 문법, 즉 사물의 물성과 빛의 재현에 방점을 두는 방식과 결을 달리한다. 그의 정물 앞에서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과 함께 있었던 '누군가'를 상상하게 된다. 작가의 간결한 표현이 대상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관계들을 그 자리에 투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 《Too Sunny》(2025-2026), oil on canvas, 27×35cm — 테라코타빛 배경 위 두 개의 빈 유리잔. 비어 있음으로써 오히려 가득 찬, 함께였던 시간의 흔적.
— — —
3. 붓터치의 결 — 찰나와 단단함 사이
정이지 회화의 형식적 특질은 경쾌하면서도 단단한 붓터치에 있다. 머뭇거림 없이 경쾌하게 그어졌지만, 그 선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화면으로 옮길 때 인물의 고유한 인상을 유지하되 너무 묘사에 치중해 생김새만이 부각되지 않도록 간결하게 채색하며 화면 속 공간과 대상의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 그리고 이 결단력 있는 붓터치는 작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찰나의 애정 어린 순간들과 '같은 결'을 공유한다.
이 방식은 만화적 기법과도 연결된다. 정이지는 이전 전시 《My Salad Days》(2022)에서 만화적인 기법 중 하나인 프레임 내에 장면을 포착하는 '컷'의 전달 방식을 자신의 회화에 가져왔다. 관찰자인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속 대상 자체보다 프레임 속 특정 상황으로서 하나의 '컷'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 《Too Sunny》에서도 그 흔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번에는 만화적 문법보다 더 회화적인 언어로 소화되어, 각 작품이 독립된 '장면'으로서 완결성을 갖는다.
빛과 그림자의 처리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측면에서 빛을 받아 절반이 그늘진 얼굴(《Waterline》), 강한 빛 속에 손과 음료컵이 맞닿은 찰나(《Lemonade》), 눈물인지 빛의 반사인지 모를 눈(《Fin.》). 정이지는 빛을 묘사하되 빛 자체를 그리지 않는다. 그는 빛이 닿은 것들의 온도와 질감, 그 순간 거기 있었던 감각을 그린다. 전시 제목 《Too Sunny》가 역설적으로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강한 빛 속에서 사물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동시에 가장 보기 어렵다.
▲ 《Waterline》(2026), oil on canvas, 73×61cm — 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절반이 잠긴 얼굴. 빛을 묘사하되 빛 자체를 그리지 않는 정이지의 방법론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 — —
4. 소품의 존재론 —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오래 머문다
4층 전시실 한쪽 벽을 채운 대작 《Titanium White and Sevres Blue》(210×410cm, oil on linen)는 공간 전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이 전시의 본질은 오히려 그 옆에 나란히 걸린 16×23cm의 소품들에 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 체리 하나, 레몬 하나, 구(球) 하나를 그린 이 작은 그림들이 이 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체리 하나를 이처럼 진지하게, 이처럼 애정을 담아 그릴 수 있는 것은 사소함을 결코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시선에서만 가능하다. 색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시리즈 — 《Cherry Red》, 《Lemon Yellow》, 《Snow White》 — 는 사물을 색으로 환원하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색을 통해 사물의 존재를 더 단단하게 각인시키는 전략이다. 레몬은 그냥 레몬이 아니라 '레몬 옐로우'가 되어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 소품들은 또한 작가의 작업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정이지는 한 인간으로서 잘 존재해야 그림을 그리는 자신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청소, 설거지, 수영, 카페 아르바이트 — 일상의 가장 사소한 것들을 성실히 해내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태도다. 그 성실한 태도가 고스란히 화면에 배어 있다. 작은 캔버스 앞에서 우리가 걸음을 멈추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위 ▲ 《Cherry Red》(2026), oil on canvas, 16×23cm / 아래 ▲ 《Lemon Yellow》(2026), oil on canvas, 16×23cm - 사물의 이름과 색을 일치시키는 이 소품 시리즈는 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 — —
5. 정이지의 계보 — 사적 서사에서 보편적 정서로
정이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한 후 2019년 첫 개인전 《숏 컷》(어쩌다갤러리2)을 시작으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2022년 상업화랑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 《My Salad Days》는 찬란한 청춘의 쓴맛에 비유한 자신의 일상과 추억을 파고들어 작가 스스로가 내부자이자 동시에 관찰자가 된 순간의 회화적 기록들로 이루어졌다. 같은 해 ART BUSAN 참가와 다수의 그룹전을 통해 빠르게 주목받았으며, 2025년 국제갤러리 그룹전 《Next Painting: As We Are》에 참가하며 한국 현대 회화의 신진 흐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이번 《Too Sunny》는 그 연장선이자 분기점이다. 인물 중심의 회화에서 정물로 범위를 확장했고, 소품과 대작의 병치를 통해 스케일의 의미를 탐구한다. 무엇보다 작가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선명해졌다. 전시 제목이 말하듯, 이제 그의 그림은 너무 밝아서 직시하기 어려운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정이지의 간결한 인물 표현은 구체적인 대상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작가 개인의 사적인 순간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다양한 관계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정이지 회화의 역설적 힘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 된다.
— — —
6. 곁을 지키는 것들 — 리뷰를 마치며
"때로 그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본질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없는 형체들 속에 머무르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하루의 껍질이 울타리 밖으로 던져질 때 뒤에 남는 것이고, 지나간 시간과 우리의 사랑과 증오에서 남는 것입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정이지의 그림은 그 '남는 것'들을 붙잡는다. 사라지기 전에, 잊히기 전에,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 체리 하나, 레몬 하나, 두 개의 유리잔, 뒷머리, 손, 눈. 곁을 지키는 것들의 아름다움은 이처럼 작고 사적이고 일상적인 형상 속에 깃들어 있다.
전시 제목 《Too Sunny》는 어쩌면 경고이기도 하다. 너무 맑아서, 너무 좋아서, 우리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지나친다. 정이지는 그 순간 앞에 멈춰 서서 오늘도 붓을 든다. 그의 회화는 진실이 일상 도처에 도사린다는 다행스러운 진실을 거듭 은유한다.
갤러리를 나오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다시 내려다봤다. 잔을 감싼 내 손이,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있는 그 형상이 — 오늘 본 어떤 그림과 꼭 닮아 있었다.
— — —
■ 주요 출품작
3층: 《Bright Corner》 31×41cm, 《Shade》 77×145.5cm, 《Sunlit》 61×50cm, 《Happy Birthday to You》 18×14cm, 《From Mom》 18×14cm, 《Morning Glory》 27×35cm, 《Titanium White and Sevres Blue》 210×410cm (oil on linen), 《Sunflower》 112.5×145.5cm, 《Fin.》 32×32cm
4층: 《Fin.》 21.5×27cm, 《Waterline》 73×61cm, 《Dazzling》 32×32cm, 《Lemonade》 27×19cm, 《Snow White》 16×23cm, 《Lemon Yellow》 16×23cm, 《Cherry Red》 16×23cm, 《Too Sunny》 27×35cm / 전작 소품 다수
■ 작가 약력
정이지 Jeong Yiji | b.1994, 대한민국 | 서울 기반 활동
학력: 2020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석사 | 2017 학사
개인전: 2026 《Too Sunny》 갤러리 콤플렉스 | 2022 《My Salad Days》 상업화랑 | 2019 《숏컷》 어쩌다갤러리2
주요 단체전: 2025 《Next Painting: As We Are》 국제갤러리 | 2022 《촉각적 순간》 아트소향 | 2021 《21세기 회화》 하이트컬렉션 외 다수
아트페어: 2022 ART BUSAN | 2021 화랑미술제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