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인의 옻칠, 마당에서 광장으로 - 최여임 개인전
옻이 작가를 선택한다
옻나무 껍질에 상처를 내면 하얀 수액이 흘러나온다. 생옻이다. 공기와 만나는 순간부터 이 수액은 굳기 시작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천연 도료 중 하나가 된다. 방수, 방충, 방부 — 한번 굳으면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옻칠 유물이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윤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완벽한 재료에는 치명적인 역설이 있다. 생옻에는 '우루시올(Urushiol)'이라는 알레르기 유발 성분이 들어 있어, 피부에 닿으면 극심한 가려움과 발진을 일으킨다. 옻나무 곁을 지나가기만 해도 옻이 오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옻칠을 하는 이들 사이에는 오래된 말이 전해진다.
"옻을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옻이 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원해도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재료. 그 선택을 받은 사람이 최여임이다. 그는 지금 인사아트센터 4층 부산갤러리에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9,000년의 재료를 오늘의 언어로
인류가 옻을 처음 사용한 것은 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 발견된 옻칠 그릇이 그 시원이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왕실과 귀족의 가구, 갑옷, 불상, 건축에 두루 쓰였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그 정수였고, 조선 사대부들은 옻칠한 문방구 하나에 선비의 품격을 담았다. 옻칠은 단순한 마감재가 아니었다. 그 시대 최고의 기술력과 미감이 집약된 문명의 언어였다.
최여임은 그 긴 역사의 끝자락을 잡고 있으면서도, 그 위에 담는 것은 철저히 오늘의 언어다. 그의 이력은 흥미롭다. 공예로 시작해 회화로 전향했다. 전환의 이유는 예상 밖으로 솔직하다. "공예품을 만들어 드리면 너무 아까워서 아무도 쓰질 못해요. 내가 좋아서 같이 누리고 싶은데, 같이 누리지 못한다." 쓰임을 위해 만든 것이 쓰임을 잃은 아이러니. 그래서 그는 화면으로 왔다. 하지만 그것은 재료와의 결별이 아니었다. 오히려 옻이 가진 미학적 가능성 — 내발광(內發光), 층위의 깊이, 현(玄)의 공간감 — 을 더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장으로의 이동이었다.
천지인 — 추상이 아닌 물성의 구조
이 전시를 관통하는 철학적 뼈대는 '천지인(天地人)'이다. 최여임은 이것을 추상적 관념으로 두지 않는다. 작품의 물성 그 자체에 구현한다.
천(天)은 화판이다. 우주이자 작가의 사유가 펼쳐지는 장. 지(地)는 재료다. 자개, 칠분(漆粉), 토분이 이루는 대지. 칠분은 마른 옻칠을 분쇄기에 갈아 만든 가루다. 자개를 얹기도 하고, 커피 분이나 목분을 더하기도 한다. 이것들이 층층이 쌓여 지(地)를 이룬다. 그리고 인(人)은 문양이다. 토분을 이용해 찍어낸 둥근 무늬들은 두 번 다시 똑같이 나오지 않는다. 도장처럼 규격화된 것이 아니라, 매번 미세하게 다른 형태로 찍힌다. 작가는 그것이 바로 인간 각자가 지닌 존엄과 독립성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동일한 인간이 없듯, 동일한 문양도 없다.
작품 표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층위의 복잡함에 압도된다. 칠하고, 말리고, 사포질하는 3단계가 한 세트다. 이것이 수십 번 반복된다. 사포질은 기계로 할 수 없다. 어느 지점에서 멈출지, 어느 색을 얼마나 드러낼지 — 그 판단은 오롯이 작가의 손과 눈에 달려 있다. 화면 안에는 빨강, 노랑, 흰색의 층들이 숨어 있다가 사포가 닿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작가가 숨긴 것이 아니라, 쌓아두었다가 조심스럽게 열어 보이는 것이다.
옻칠의 색, 현(玄)의 공간
옻의 색을 이해하면 작품이 달리 보인다. 나무에서 갓 채취한 옻은 뽀얀 베이지색이다. 정제하면 맑은 니스 빛이 된다. 여기에 철분을 섞으면 깊고 윤기 있는 검정이 된다. 붉은 암석 안료인 주사(朱砂)를 섞으면 선명한 주칠이 된다. 모두 지구에서 나는 천연 재료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학 성분 없이 자연으로만 완성되는 유기농 도료 — 최여임이 이 재료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게 만들어진 옻칠의 검정은 일반적인 검은색과 다르다. 빛을 흡수해 납작하게 보이는 보통의 검정과 달리, 옻칠의 흑(黑)은 깊다. 표면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언가가 빛나는 느낌, 내발광(內發光)이다. 여러 겹의 칠 사이에서 빛이 굴절되고 산란되기 때문이다. 최여임은 이 검정을 '현(玄)'이라 부른다. 단순한 색이 아니라, 우주와 작가의 철학이 담기는 공간으로서의 검정. 동양 철학에서 현은 하늘의 색이자 도(道)의 색이다. 그것이 화면 위에 살아 있다.
마당에서 광장으로, 사라진 주소
전시장에서 오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작품은 〈마당〉 연작이었다. 마당. 우리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열린 공간. 작가는 그것이 오늘날 '광장'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한다. 어릴 적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자라 광장으로 나갔고,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더 나아가 디지털 공간에서 논다. 마당→광장→메타버스. 그 문화적 연속성과 변화를 작가는 옻칠의 격자와 자개의 배열로 그려낸다.
작품 한 귀퉁이에는 '서울 어딘가의 주소'가 적혀 있다. 그 주소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된 한국계 입양인 — 동양인 최초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에 오른 그 여성 — 이 고국을 찾았을 때, 자신이 태어난 주소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는 기사를 작가가 읽었다. 그 기억이 화면 안에 새겨졌다. 없는 주소가 품은 있는 기억. 세상에는 사라진 장소가 있고, 사라진 장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움을 기록하는 예술가가 있다. 최여임은 그 셋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다.
〈대취타〉 연작도 인상적이다. 이것은 형상을 정확히 그린 것이 아니다. 태평소 소리, 꽹과리, 임금의 어가가 행차할 때 울리는 그 행렬의 소리와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며 옻으로 그려낸 것이다. 드리핑, 스플래시, 원형들의 충돌. 그 화면에서는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옻칠이라고 해서 늘 정제되고 고요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한 방에 날린다.
전통을 무기 삼아, 현대를 말하다
최여임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재료는 전통이되, 표현은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것. "옛날식의 나전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아이들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전통이지만 현대 같은 작업을 하고 싶다." 이 말이 그의 작업 전체를 요약한다.
그는 한국 옻칠의 현재를 걱정한다. 과거에 많은 장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이 문화가 단절되지 않으려면,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세련되고, 의도적으로 동시대적이다. 전통의 계승이 박물관 안에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화면 위에서 지금의 감각으로 숨 쉬어야 한다.
재료비와 노동력을 생각하면 가격도 결코 높지 않다. 작가는 이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접근 가능한 가격을 유지하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옻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컬렉터의 벽장 안에서 잠자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에서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빠른 세상에 느린 증거
옻칠은 느리다. 반드시 느려야 한다. 습도 70~80%, 온도 20~25도의 조건이 갖춰져야만 마른다. 건조한 날씨에는 아예 굳지 않는다. 그 조건을 만들어 기다리고, 굳으면 사포질하고, 다시 칠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해야 비로소 하나의 화면이 완성된다. 몇 달이 걸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의 표면에는 시간이 쌓여 있다. 한 번의 붓질이 아니라 수십 번의 겹침이 만들어낸 깊이. 나이테처럼, 지층처럼. 그 표면을 눈으로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보낸 시간을 함께 경험하는 일이다.
AI가 속도와 효율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이 느린 증거들은 더욱 빛난다. 알고리즘은 층위를 흉내낼 수 없고, 기계는 사포를 언제 멈춰야 할지 모른다. 옻나무가 상처를 입어야 수액을 내듯,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무언가를 감수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 빛은 이번 전시장에서, 9,000년의 시간을 품은 옻칠의 깊고 윤기 있는 표면 위에서, 충분히 확인되었다.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