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한국어로 꾼다 - 김연진 개인전 (스페이스유닛플러스)
파편(破片)은 깨어지거나 부서진 조각이다. 그리고 때로는 바로 그 파편에서 가장 정직한 예술이 탄생한다.
을지로 스페이스유닛플러스에서 6월 5일 개막한 김연진(b.1978) 개인전 《On, Of, and About》은 표면적으로는 혼합 재료를 활용한 평면·설치 작업 17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그러나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관람자는 이것이 재료 실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깊은 고백임을 직감하게 된다.
"지금은 주로 영어로 말하지만, 꿈은 한국어로 꾼다."
작가노트에 담긴 이 한 문장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언어학자들은 꿈의 언어를 '정서의 모국어'라 부른다. 논리와 이성이 잠든 사이,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된 언어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낮에는 영어로 생각하고 협상하며 살아가지만 밤의 무의식은 여전히 한국어의 품속에 있다. 이 분열은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작가가 출발하는 예술의 좌표다.
'불완전한 발음'이 드러낸 전시 철학
전시 제목 《On, Of, and About》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장치가 숨어 있다. 리플릿 상단에는 이 전치사들의 발음기호가 두 줄로 병기된다. 'ɒn, æv, əˈbaʊt'와 'on, ob, aˈbaut'. 전자는 표준 영미식 발음이고, 후자는 한국인 영어 화자의 발음이다.
이 전시의 평론을 맡은 송준영 협력큐레이터는 이 지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대다수 한국인의 영어 구사는 'English'가 아닌 'english'나 'konglish'이며,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극복의 대상이지 결코 축복받은 혼성의 결과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김연진은 바로 이 '불완전한 번역'의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 자리가 결함이 아닌, 독자적 언어가 발원하는 지점임을 선언하면서.
번역은 원본의 배반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이다
발터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에서 번역을 원작의 의미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언어의 운동 법칙에 따라 원작의 의미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정의했다. 번역은 원본의 복사가 아니라 새로운 생성이다.
김연진의 작업이 정확히 그러하다. 그는 닥종이·한지·종이타월·자작나무 패널·섬유·레이스·플라스틱 비닐과 자연의 돌·조개껍질 등 꾸준히 수집한 파편들로 작품을 구성한다. 한국 전통 조각보의 봉합 방식을 콜라주로 번역하고, 국민학교 교과서의 천공 패턴을 한글 기표와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이미지 언어를 생성한다.
소설가 사무엘 베케트는 아일랜드인이면서도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외국어로 쓰면 스타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좋다"는 그의 말은, 모국어의 관성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역설을 담는다. 김연진의 작업 역시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문화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두 문화 모두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얻었다.
공간을 채운 작품들 — 파편이 기대어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
전시장에 들어서면 투명한 폴리프로필렌과 자작나무 패널, 닥종이와 한지가 매달린 설치 작업이 먼저 시선을 붙잡는다. 형광 노랑·분홍·투명 플라스틱 비닐이 빨랫줄처럼 걸린 〈Untitled 4〉(2026)는 처음에는 미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참을 바라보면 이것이 완성의 거부, 곧 '영원한 과정'의 선언임을 깨닫게 된다.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Lives of Things〉(2025)는 더욱 인상적이다. 전통 동아시아 건축 도상이 인쇄된 박스 위에 자작나무 막대기가 수직으로 솟고, 상단의 선반에는 돌이나 나무껍질 같은 자연물이 얹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공물인 붉은 망사 주머니가 구조물 한편에 비스듬히 묶여 있다. 동아시아의 기억, 자연의 시간, 일상의 포장재가 하나의 수직 구조 안에 공존하는 이 형상은, 곧 작가 자신의 실존적 자화상으로 읽힌다.
전시장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세로로 긴 대형 작업에서는 어떤 색도 서로 완전히 녹아들지 않는다. 분홍이 파랑 위에 올라앉고 노랑이 보라와 경계를 긋지만, 각자의 색감은 고유한 채로 남는다. 송준영 큐레이터가 "두 가지 색이 완벽하게 섞이지 않으면서 각자의 결을 유지하며 새로운 색채 단어를 선보이는 양태"라 평한 바로 그 언어다.
조각보가 완성에 이르지 않는 이유
전시장 안쪽의 대형 조각보 작업은 이 전시의 또 다른 핵심을 드러낸다. 조선의 여인들은 버려진 천의 파편을 모아 이어 붙여 보자기를 만들었다. 쓸모없다 여겨진 자투리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김연진의 작업에서 파편들은 조각보처럼 완전한 통합에 이르지 않는다. 봉합선이 보이고, 어긋남이 남아 있다.
"동화의 과정은 언제나 부분적이다. 완전히 이루어지지도 완전히 거부되지도 않는다."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그 어긋남이 바로 이 작업의 솔직함이다.
피진(Pidgin)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시각 언어
송준영 큐레이터는 평론의 말미에서 언어학 개념 '피진(pidgin)'을 가져온다. 서로 다른 언어 화자들이 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혼합 언어인 피진은 어느 언어의 규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진은 열등한 언어가 아니다.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발명이다.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 "경계에 사는 자만이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김연진의 작업은 바로 이 피진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시각 언어다. 한지와 폴리프로필렌, 동아시아 건축 도상과 서구식 콜라주, 조각보의 격자와 아상블라주의 해체. 이 언어는 어느 미술관의 정전(正典)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적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번역자다
통섭미술의 관점에서 이 전시를 바라보면, 김연진의 작업은 한 이민자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조건을 다루고 있음이 보인다. 서울의 직장인은 한국어와 직장 영어 사이를 번역하고, 세대 차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문화 번역을 요구하며, SNS는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의 끝없는 번역을 강제한다. 그 모든 번역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경계를 살았다. 일본 유학 중에도 한국어로 시를 썼던 그의 언어는, 지배 언어의 그늘 아래서도 꺼지지 않는 자기 언어의 불꽃이었다. 김연진의 파편들도 그러하다. 완전히 통합되지도, 완전히 버려지지도 않는 채로 각자의 결을 유지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낸다.
번역은 원본을 배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본이 혼자서는 닿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그것을 데려간다. 을지로의 작은 공간이 그 진실을 조용하고도 깊이 있게 증명하고 있다.
김연진 개인전 《On, Of, and About》
2026년 6월 5일(금) — 7월 4일(토) | 수~토 오후 1시~6시
스페이스유닛플러스 (SpaceUnit+) |
총괄: 강지선·손원영 | 평론: 송준영
김연진 작가는 뉴욕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뉴욕주립대학교 빙햄튼(Binghamton University, SUNY)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