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닿을 곳에 있는 기억 - Claire Kim (김선경) 개인전
파주 제이갤러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묘한 감각의 교차를 경험했다.
눈앞의 캔버스들은 분명 유화이고 물감은 두텁게 쌓여 있는데, 화면 속 시간은 어딘가 '일시정지'되어 있었다. 영화로 치면 특정 프레임에서 멈춘 스틸컷, 소설로 치면 긴 서사 속 쉼표 직전의 한 문장. 김선경의 그림은 완결이 아니라 그 직전, 무언가가 막 시작되거나 방금 끝났거나를 붙잡아 놓는다. 그 붙잡힌 순간 안에서 관객은 자신만의 기억과 조용히 마주친다.
1. 작가론 — 25년의 잠복기, 호흡으로서의 그림
김선경은 1971년생이다. 상경계열의 전공을 마치고 사회에서 마케팅 일을 했다. 그러나 그 기간 내내 그림을 그렸다. 발표하지 않은 채로, 교과서 구석의 낙서처럼, 조용하게.
이 작가와의 인연은 한국작가후원연대(KASC)의 《너이들 2년후》프로그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갤러리0도씨와의 매칭 작가로 선정되었다. 2025년의 지원신청서에서 그는 스스로를 '나이 많은 신진작가'라고 불렀다. 그 자조 섞인 표현 안에, 상경계열 전공 후 사회에서 마케팅 일을 하면서도 25년간 그림 손을 놓지 않았던 사람의 지독한 성실함이 응축되어 있다.
그림은 그에게 목표가 아니라 호흡이었다. 초중고 학창시절부터 교과서 구석 낙서로 이어진 그 호흡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 뒤늦게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를 마치고 바로 이어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회화과 석사까지 밟은 것도 그 호흡을 계속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사실은 작품을 읽는 방식을 바꾼다. 그의 그림 속 '경계인'의 감각 - 아직 완전히 어느 쪽도 아닌 상태, 어른과 아이 사이, 현실과 허구 사이 - 은 철학적 구성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살아온 생의 방식이다.
2. 미술사적 포지션 — 동화(童話)와 동화(同化) 사이
김선경의 그림을 두고 흔히 '동화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동화적 감성의 계보를 짚지 않으면 절반밖에 읽히지 않는다.
◈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서사적 상징 언어
미술사적 좌표로 보면, 그의 작업은 19세기 후반 영국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문학적 서사성과 상징 언어에서 출발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표정 속에 어른의 세계에 대한 불안을 녹여냈듯, 작가 역시 소년·소녀의 몸짓에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존재'의 긴장감을 입힌다.
특히 《After School Fishing》에서 활용한 민들레 홀씨와 흰 박꽃의 알레고리, 헨리 벤슨의 흑백 라이카 사진에서 영감받은 수평·수직 교차 구도는 정통 서양 인물화 기법의 자장 안에 있다. 그러나 화면을 가르는 윤슬의 거친 붓질은 모더니즘의 어법이다. 이 그림은 시대를 하나로 특정할 수 없다. 경계인의 그림이 경계 위에 서 있다.
◈ 알렉스 카츠의 크롭 감각
화면 구성에서는 알렉스 카츠(Alex Katz)의 트리밍(trimming) 감각이 환기된다. 카츠의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잘려나가며 긴장을 만들듯, 작가의 그림들도 머리를 자르고 발을 잘라내며 화면 밖의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 잘려나간 자리에서 관객은 '이건 분명히 영화 속 한 장면이야. 다음 장면도 있겠지'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전시장에서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작가는 공감했다.
◈ 키치를 원재료로 삼는 방식
결정적인 차이는 '키치'를 다루는 태도다. 에릭 피슬(Eric Fischl)이 미국 중산층의 억압된 욕망을 폭로하는 도구로 키치를 사용한다면, 김선경은 키치를 죄의식 없이 사랑한다. 80~90년대 뮤직비디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끼워주던 LIFE 명화집, 순정만화의 한 컷, 이것들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감각 자체를 구성한 원재료다.
"제 그림은 사생을 잘 안 나가요. 만화 그리듯이 그려요. 교과서 구석이 다 그림이었는데 그게 커진 거예요. 그게 색을 입은 거예요."
◈ 색채의 변곡점 — 영국에서 파주로
《Reaching Back》 전시로 넘어오면 작가의 색채 언어는 뚜렷한 변곡점을 맞는다. 2025년 이전 포트폴리오가 크롬 그린, 세룰리안 블루, 브릴리언트 핑크로 가득한 환한 여름이었다면, 이번 신작들은 추억이 산화(酸化)된 베이지, 오커, 로우 엄버의 시간으로 이동해 있다. 작가는 이를 '장소의 변화'라고 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 파주 헤이리의 빛, 제이갤러리의 목재 가구와 낮은 조도, 그 모든 환경이 색채로 번역되었다.
3. 《After School Fishing》- 베네치아 피그먼트와 경계인의 초상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은 작품은 《After School Fishing》(190×130cm, 2024)이었다. 낚싯대를 든 소년이 노을빛 물가에 맨발로 서 있다. 교복인 듯 보이는 재킷을 걸치고, 바지 끝단은 접혀 있으며, 발 아래엔 민들레 홀씨가 날리고 흰 박꽃이 피어 있다.
에스키스만 열 장을 그렸다고 했다. 넓게도 그려보고, 좁게도, 헤르난 바스처럼 풍경 속에 인물 하나만 넣어보기도 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단 하나의 인물, 그 인물의 몸짓과 표정에 모든 것을 건 구도였다.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경계. 그걸 담고 싶었어요. 눈에 솔직히 띄고 싶어서 사람 하나만 잡은 거예요."
◈ 베네치아 피그먼트의 시행착오 - 물감의 층위가 기억처럼 행동한다
이 그림의 진짜 이야기는 물감에 있다. 작가는 베네치아에서 직접 구해온 천연 피그먼트를 사용했다. 직접 나무막대로 캔버스틀을 짜고, 린넨을 스트레칭하여 래빗글루와 오일그라운드로 처리하는 17~18세기 전통 방식 그대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피그먼트는 그를 시험했다. 오일이 마르면 피그먼트가 날렸다. 예상하지 못한 색깔들이 캔버스에 안착했다.
"기대도 못하는 색깔이 다 안착이 되는 거예요. 레이어가 보이죠."
그 시행착오의 흔적이 지금 화면에 남아 있다. 묘하게 분화된 군청과 회색의 중간인 재킷 색깔이 그것이다. 나는 전시장에서 각도를 바꿔가며 그 색을 한참 들여다봤다. 형광등 아래서는 어둡고, 측면 스팟 조명이 닿으면 다른 층위의 색이 떠오른다. 물감의 층위가 기억처럼 행동한다.
◈ 런던 구매 제안을 거절한 이유 - 개인전이 더 중요하다
이 작품은 2024년 런던 MP Birla Millennium Art Gallery의 '인연(因緣)' 기획전에 선정 초대된 작품이다. 당시 런던의 한 갤러리가 구매를 제안했으나, 작가는 거절했다. "개인전이 작가로서는 더 중요하지, 파는 게 중요하지 않아." 그 선택의 결과로 지금 이 작품이 파주 J갤러리 벽에 걸려 있다. 그에게 그림은 시장의 언어가 아니라 성장의 기록이다.
이것은 한국의 장면이 아니다. 작가도 인정했다. 교복 재킷을 입고 맨발로 낚시하는 소년이라는 설정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목가적 풍경화의 문법이다. 헨리 벤슨의 흑백 라이카 사진에서 영감받은 수평·수직 교차 구도, 민들레 홀씨와 박꽃의 알레고리—이것은 정통 서양 인물화의 기법이다. 그러나 화면을 가르는 윤슬의 거친 붓질은 모더니즘이다. 경계인의 그림이 경계 위에 서 있다.
4. 《Reaching Back》— 뫼비우스의 시선, 벨라스케스의 후예
이번 전시의 핵심은 《Reaching Back》(162.29×130.3cm, 2026)이다. 나는 이 그림을 작품 목록에서 먼저 보고 전시장에 왔다. 전시장에 서서 실물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미리 유추했던 것이 맞았음을 확인했고, 동시에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있음을 발견했다.
◈ 메타회화(Meta-painting)의 구조 - 그림 속 그림 속 관객
캔버스 위에 갤러리 공간이 그려져 있다. 그 갤러리 안에 뒷모습의 소녀가 서 있다. 소녀가 바라보는 것은 벽에 걸린 또 다른 그림 속 그림이다. 그 그림 안에는 무채색으로 처리된 두 소년과 소녀가 벤치에 앉아 있다. 관객이 이 작품 앞에 서는 순간, 구조는 중첩된다. 나는 뒷모습의 소녀를 바라보고, 소녀는 그림 속 그림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보이는 대상이 순환하는 이 구조, 나는 이를 뫼비우스의 띠라고 불렀고, 작가는 그 표현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선의 중첩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1656)이 구현했던 '시선의 교란'을 현대적 문법으로 재활용한다. 벨라스케스가 화면 속에 스스로를 그려 넣어 화가-모델-관객의 삼각관계를 뒤흔들었듯, 작가는 관객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소녀를 화면 안에 심어놓았다. 그 소녀를 통해 나의 시선은 화면 안으로 초대된다.
◈ 시점(視點)이라는 장치 — 소녀인가, 아이인가
작가는 소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렸다. 그 선택이 만드는 효과를 나는 현장에서 직접 말했다. 눈높이로 바라보면 소녀로 보이고, 위에서 내리까니 나이가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성장해 보일 수도, 아직 어릴 수도 있는 그 시점의 모호함, 이것도 의도된 장치다. 작가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항상 '아직 완전히 어느 쪽도 아닌 상태'에 있다.
◈ 무채색의 심리학 — 각인과 재구성
무채색의 사용도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이를 '각인된 추억'의 은유라 설명한다. 가장 깊이 각인된 기억은 오히려 흑백 사진처럼 탈색되어 있다는 심리적 진실을 시각 언어로 옮긴 것이다. 동시에 벤치에 앉은 소년·소녀가 커플 운동화를 맞춰 신고 있다. 각인된 기억도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너스레가 살아 있다. 기억이란 언제나 재구성이다.
◈ 여백 — 관객이 걸어 들어갈 공간
이번 전시에서 나는 이 작품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이 유일하게 '내가 들어갈 여지'를 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신작들이 색과 서사의 밀도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Reaching Back》은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그 여백 안으로 관객이 걸어 들어갈 수 있다.
5. 2.5D 회화와 입체 서사 — 캔버스 밖으로 걸어나온 인물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인상적인 작업은 우드패널 커트아웃 시리즈다. 《In the drowsy afternoon》과 《나른한 오후의 산책》은 캔버스 밖으로 걸어나온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를 '2.5D 작품'이라 부른다—회화(2D)와 조각(3D)의 사이.
빨대를 물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금발 소녀, 도베르만을 줄에 매고 서 있는 소년. 이들은 전시장 바닥을 딛고, 관객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동선 안에 개입한다. 이 장치는 단순한 설치적 재미를 넘어, 작가가 일관되게 탐구해온 '허구와 현실의 경계 흐리기'의 입체적 실현이다. 영화 감독이 프레임 안에 배우를 배치하듯, 작가는 갤러리 공간 전체를 프레임으로 삼고 관객을 그 안의 엑스트라로 초대한다.
메타회화 연작 《그날, 문득》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K드라마의 클리셰 - 우연한 만남의 순간 배경이 꽃밭으로 변하는 연출을 오마주한 이 작품은, 서브컬처의 감각을 회화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가의 가장 직접적인 발화다. 그 옆에 나란히 걸린 《Preview before the show》는 누군가를 반겨줄 자리, 여백의 공간을 시각화한다. 제이갤러리가 일본 미니멀 가구 수입업체와 연계된 갤러리라는 맥락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두 소품은 갤러리의 간결한 가구 디자인과 대화하도록 제작되었다.
6. 기억의 가소성과 유화의 물성
나는 컬렉터이자 미술인문학자로서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그림은 나에게 무엇을 건드렸는가. 김선경의 작업이 건드린 것은 기억의 편집 방식이었다.
우리는 기억을 '저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재구성'한다. 신경과학자들이 말하는 기억의 가소성(memory plasticity) - 우리가 어떤 기억을 꺼낼 때마다 그 기억은 조금씩 변형된다. 작가의 그림 속 인물들이 끝내 서로를 완전히 마주하지 않는 것, 무채색 추억 속 소년·소녀가 커플 운동화를 맞춰 신고 있는 것 - 이 모든 장치들은 '기억이란 믿을 수 없다'는 작가의 조용한 선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작가가 지금 이 시점에, 이 전통적 유화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다. 디지털 이미지는 완벽하게 재현하지만, 유화의 붓질과 물감 층위는 시간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보존한다.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천연 피그먼트가 예기치 않은 색으로 안착하듯, 기억도 경험의 각도에 따라 다른 빛깔을 보인다. 형광등 아래서는 어둡고 측면 스팟 조명이 닿으면 다른 층위의 색이 떠오르는 그 재킷 색깔처럼.
그는 트렌드를 쫓지 않는다. 영국 왕립예술대학을 나와 런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했으면서도, 파주의 조용한 갤러리에서 45.5cm짜리 캔버스에 사과나무 위 꼬마를 그린다. 그 규모의 낮춤이 결코 좌절이나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전시가 증명했다. 작은 캔버스 안에도 긴 이야기가 산다.
성장은 소란스럽지 않다고, 그의 그림이 말하고 있었다.
▪ 작가 약력 김선경(Claire Kim, b.1971)
Royal College of Art Painting MA | 홍익대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
주요 개인전:
2026 《Reaching Back》J Gallery PAJU /
2025 《Fictional Veracity》Gallery DOS /
2024 《In Yeon, 인연》MP Birla Millennium Art Gallery, 런던 /
2023 《나른한 봄날을 기다리며》Loft Ground
수상:
2025 여성신문 주관 한국여성작가 회화공모전 특선 /
2024 Travers Smith CSR Art 2023–2024 대상자 선정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