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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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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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BUFFERING》 임종연 × 오현지 갤러리 크레인 | 2026.05.30~06.20
이상민   승인 2026.05.31 14:54

전시장 문을 열기 전, 제목이 먼저 나를 붙잡았다. Double Buffering. 컴퓨터가 화면을 끊김 없이 보여주기 위해 데이터를 두 개의 버퍼에 교대로 채워 넣는 기술이다. 한쪽이 출력되는 동안 다른 쪽은 이미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 교대(交代)가, 우리 눈에는 매끄러운 연속으로 닿는다. 이 전시의 제목은 그 기술적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전시장 안에서 그것은 훨씬 오래된 인간의 문제와 만난다. 기억과 시간, 보존과 소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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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닝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임종연 작가(좌측)와 오현지 작가(우측)      



전시 서문은 시각예술가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아나 데 마르키(Cristiana de Marchi)가 썼다. 베이루트와 두바이를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전시 현장에 직접 오지 못한 채 작가들의 포트폴리오와 설치 배치도만을 보고 글을 완성했다. 그런데 바로 그 거리감이 이 서문에 특별한 밀도를 부여했다. 그가 있는 중동은 지금 전쟁 중이다. '더블 버퍼링'이라는 컴퓨터 용어를 그는 '완충지대(buffer zone)'—충돌하는 두 세계 사이의 긴장 공간—로 읽어냈다. 같은 개념을 전혀 다른 현실에서 바라본 시선이었고, 그래서 그 서문은 유달리 무겁고 깊었다. 기획자의 말처럼, "기획의 방향성은 같았지만 전혀 다른 현장에서 바라본 글"이었다.


이번 전시는 1999년생 임종연과 2000년생 오현지, 두 젊은 작가의 2인전이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는 두 사람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긴밀하게 교차한다.



임종연 — 장면과 장면 사이를 흐르는 것

벽에 걸린 임종연의 회화들은 간격 없이 연속으로 배치되어 있다. 의도된 선택이다.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러나 벽 앞에 서면 어느 순간 장면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읽히기 시작한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배치가, 보는 사람의 눈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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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연〈내가 이야기를 들려줄게〉(Oil painting on canvas, 130.3×130.3cm, 2026)


대표작 〈내가 이야기를 들려줄게〉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두 마리의 새를 담았다. 어두운 무늬의 새와 갈색 새가 서로 부리를 맞대고 있다. 먹이를 건네는 것인가, 아니면 충돌하는 것인가. 작가는 오프닝에서 "돌봄처럼 보이기도 하고 충돌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호한 상태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캔버스 앞에 서면 그 찰나는 계속 흔들린다. 보는 각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같은 그림이 어떤 날은 다정하게, 어떤 날은 불안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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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연 <다시 갔을 땐 없었는데〉(Oil painting on canvas, 130.3×130.3cm, 2026)   


〈다시 갔을 땐 없었는데〉에서는 말라 비틀어진 식물 다발이 화면 전체를 점령한다. 겹겹이 마른 잎과 줄기가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형상은 무언가의 흔적 같기도 하고, 정밀하게 채집된 표본 같기도 하다. 분명히 거기에 있었던 것. 지금은 사라진 것의 기록. 제목이 붙어야 비로소 이 그림이 기억에 관한 것임을 깨닫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방향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회화가 하나의 장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장면의 전후를 읽어내게 하는 구조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 말의 진의를 이 연속 배치가 증명한다. 나란히 걸린 그림들은 각각 독립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사이의 무언가 감정의 이동, 기억의 연상, 시간의 잔상을 보는 이 안에서 발생시킨다. 임종연의 회화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장면들 사이'를 그리고 있었다.



오현지 — 껍데기가 된 기억들의 건축

오현지의 조각은 다른 방식으로 공간에 개입한다. 임종연의 회화가 벽을 따라 흐른다면, 오현지의 작업은 공간을 점(點)처럼 찍는다. 절제된 형태이지만, 그 안에 담긴 서사는 밀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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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지 〈indexing...〉(Mixed media installation, 170×75×12.5cm, 2026)     


이번 전시에서 가장 시선을 붙드는 작품은 〈indexing...〉이다. 바인더 앨범의 타공판 고리에서 형태를 따왔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금속 기둥에서 형형색색의 테이프 조각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설치할 때마다 형태가 달라지는 이 구조물은 벽과 벽, 바닥과 공간을 연결하며 '인덱싱'—색인, 목록화, 분류—의 행위를 물리적으로 가시화한다. 데이터를 정리하듯 기억을 정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이 금속 기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이 모든 작업의 출발점을 오프닝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휴대폰 앨범의 사진이 초기화되어 사라져버린 경험. 내 것이라 믿었던 데이터가 기술 환경의 변화 한 번에 소멸해버리는 황망함이 그것이었다. "디지털 안에 저장된 기억이 갑자기 초기화돼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들여 만드는 작업을 통해 그런 기억이나 시간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 경험이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의 외형을 참조한 조각들의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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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지〈저장하기의 기술(The Technique of Saving)〉(Mixed media installation, 10×10×7cm, 2026)        


자신의 작업 상태를 작가는 '껍데기의 상태'라 부른다. 연약한 속살이 바깥으로 무언가를 분비해 단단한 껍데기를 만들어가듯, 사라질 것들을 재료 삼아 물질로 변환하는 과정이 작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저장하기의 기술(The Technique of Saving)〉연작이 그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핀에 꽂힌 투명한 작은 상자들이 격자무늬 받침대 위에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사진이 전사되어 있다. 기억을 보관하는 상자들. 그러나 영원히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작품 제목이 '저장하기의 완성'이 아닌 '저장하기의 기술'인 것은, 그 불완전함을 작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업이 만나는 지점 — '붙잡을 수 없는 것을, 그래도 붙잡아야 한다면'

두 작가의 작업은 매체도, 접근 방식도 다르다. 임종연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흐름을 다루고, 오현지는 데이터와 물질 사이의 변환을 다룬다. 그런데 전시장을 걷다 보면, 그 둘이 결국 같은 질문을 다른 언어로 던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그래도 붙잡아야 한다면?


임종연의 회화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지 않으면서 그 전후를 화면 속에 구조화하려 하고, 오현지의 조각은 사라진 데이터를 물질로 소환해 임시적이나마 현존하게 만든다. 둘 다 완전한 보존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불가능한 보존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기획자는 오프닝에서 이 전시의 첫 번째 주제를 이렇게 말했다. "설령 붙잡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아야 한다 해도, 이 한 공간에 이 두 작가가 만나는 시간만큼은 이것이 유효하게끔 만들자." 그 말이 전시 전체를 요약한다.


크리스티아나 데 마르키는 전쟁 중인 중동에서 이 전시를 읽으며 이렇게 썼다. "어떤 아카이브도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록하고, 저장하고, 그린다. 실패가 믿지 않는 자에게만 보이는 믿음처럼, 이 과정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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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닝에서 전시의 기획을 설명하는 갤러리크레인 윤태균 대표

 


컬렉터의 시선으로 덧붙이자면, 임종연의 〈내가 이야기를 들려줄게〉는 오래 보아도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 작품이다. 돌봄과 충돌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불안정한 화면은, 보는 날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꺼내줄 것이다. 오현지의 〈indexing...〉은 어떤 공간에 놓이더라도 그 공간과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설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는, 소장 이후에도 작품이 계속 살아 움직인다는 의미다.


갤러리 크레인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더블 버퍼링은 결국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의 은유가 아닐까. 한쪽에서 현재를 출력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이미 다음을 준비한다. 그 사이에서 기억은 흐르고, 이미지는 만들어지고, 조각은 단단해진다.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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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지 작가(좌측), 임종연 작가(중앙), 윤태균 대표(우측)



전시는 2026년 6월 20일까지 갤러리 크레인에서 계속된다. 

임종연 @i_am_jong_yeon_works

오현지 @dhllgullsw

갤러리 크레인 @gallery_c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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