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이 말을 걸어오는 자리 - 장일권 개인전(피앤씨토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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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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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지운 화가 장일권 장일권 개인전 <순간의 色이 머물다> - 피앤씨토탈갤러리 21년 독일 화업이 빚어낸 '색면의 철학'과 두 작품이 건넨 말
이상민   승인 2026.05.30 08:43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작품들이 먼저 말을 건다. 설명을 읽기 전에, 제목을 확인하기 전에. 그것이 장일권 회화가 가진 첫 번째 미덕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색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동국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헤르만 알버트 교수 아래 석사를, 노르베르트 타데우스 교수 아래 마이스터슐러 과정을 마친 이력은, 단순히 유학파 작가의 스펙이 아니다. 색과 면이라는 근원적 조형 언어를 21년 동안 유럽의 토양에서 육화(肉化)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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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Day〉 116.5 x 91cm, Oil on Canvas, 2026

 

"이론을 먼저 만들지 말고, 그림을 먼저 완성해 놓고 이론을 만들면 되겠다."
- 장일권, 스승 헤르만 알버트 교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집은 집이 아니고,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저는 색과 면만 생각해요. 집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지, 집이 아니에요." 이 선언은 단순한 추상화의 논리가 아니다. 색을 표현하기 위해 '면'이 필요하고, 면을 구성하기 위해 '이미지'가 소환될 뿐이라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회화 철학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풍경화는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절제한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풍경'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투시와 원근이 개입되는 순간 빛과 그림자의 사실적 논리가 따라붙고, 그렇게 되면 색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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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피앤씨토탈갤러리 전시장 전경

 

일상이 재구성되는 방식
〈Good Day〉 앞에서 나는 한참 멈추었다. 처음엔 집이 보였다. 오래 보다 보니,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에서 묘한 차이가 감지됐다. 잎이 무성한 나무와 잎이 없는 나무가 나란히 있었는데, 잎이 없는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다른 요소들은 저마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나무만은 홀로 그림자 없이 서 있었다.

이상민 : "집보다 나무가 먼저 보였고, 잎이 없는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더군요. 뭔가 많은 얘기를 해주는 작품인 것 같았어요."
장일권 : "맞습니다. 그림자가 아니라 어둠이에요. 추상적 개념에는 빛이 없어요. 빛이 들어오면 그건 리얼리티로 가는 거예요. 그림자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 짧은 대화에서 통섭미술의 핵심이 다시 확인됐다. 하나의 화면이 여러 학문의 언어로 읽힌다는 것. 〈Good Day〉는 기상학적 '좋은 날'이 아니라, 감상자 각자가 스스로 재구성하는 날이다. 작가는 이미지를 배치하되, 의미는 비워둔다. "작가의 의무와 책임은 벽에 거는 것까지"라는 그의 말은, 작품의 나머지 절반을 관객에게 내어주는 관대한 양도(讓渡)다. 잎이 있는 나무와 없는 나무, 그림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대비가 '가득함과 비어있음', 혹은 '현재와 소멸' 사이의 명암(明暗)처럼 읽혔다. 오래 볼수록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는 것, 그것이 〈Good Day〉가 좋은 작품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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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피앤씨토탈갤러리 전시장 전경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각
〈별밤 2〉 앞에서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만약 제가 이 작품에 제목을 붙인다면, '달빛'이라고 하겠어요." 별이 그려진 그림인데, 달이 보였다. 오른쪽 어딘가에 달이 있고, 그 달빛 때문에 화면이 저렇게 환하게 빛나며, 그 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 같았다.

이상민 : "별을 보고 있는데 저는 달이 보였어요. 달이 밝아서 이렇게 그림자가 생기는 느낌이 들었어요."
장일권 : "이사장님, 제목 바꿔도 돼요. 저 뒤에 사인 아직 안 했어요."

이 짧은 웃음의 순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제목이란 통상 작가의 독점적 발화다. 그런데 이 작가는 관객의 시선이 작품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여유가 아니라, 철학이다. 작가의 스승이 일찍이 말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각을 생각해보라." 화면에 보이지 않는 시각이 있다고.

직관적이지 않은 화면인데,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분명하다. 별밤이되 별만 있지 않은 밤. 그림이 기억을 불러내는 순간, 감상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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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피앤씨토탈갤러리 전시장 전경

 

장일권의 회화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서 있되, 그 경계 자체를 지운다. 그것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다. 색과 면이라는 조형 언어에서 출발하여, 이미지를 경유하고, 감상자의 내면에서 의미가 완성되는 회로다. 이 구조는 통섭미술의 원리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서로 다른 학문과 감각이 교차하고, 그 교차점에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 작가는 "색의 어울림이 이루어지면 그때 손을 놓는다"고 했다. 42년 화업(畵業)의 완성 기준이 '어울림'이라는 것.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고, 감각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장일권의 그림 앞에서 작가의 설명이 아닌, 나 자신의 언어를 찾았다. 그것이 좋은 그림의 조건이다. 작가가 다 말하지 않아야, 관객이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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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Day> 작품 앞에 나란히 선 필자(좌측)와 장일권 작가(우측)

 

장일권 작가는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 Braunschweig)에서 헤르만 알버트(Hermann Albert) 교수 지도 아래 석사 과정을, 노르베르트 타데우스(Norbert Tadeusz) 교수 아래 마이스터슐러 과정을 이수했다. 21년간의 독일 체류를 통해 신구상주의 회화의 핵심 맥락을 체득한 후 귀국,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991년 설치 작업으로 미술계에 등장한 이후 인체 회화를 거쳐 현재의 색면(色面) 중심 구상 회화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에 걸쳐 자신의 조형 언어를 끊임없이 갱신해왔다. 한 작품을 수년에 걸쳐 완성하는 치열한 작업 태도와, 매 전시마다 새로운 작품으로만 임하는 원칙으로, 단순한 기량을 넘어 사유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국내외 갤러리 및 아트페어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전시는 삼청동 피앤씨토탈갤러리에서 6월 14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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