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그림, 익히지 않아도 되는 세계 — 원민영 《타르타르》 - 서울 상히읗 갤러리
원민영 작가
전시서문을 쓴 조현진은 이것을 "바다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침식되거나 덧붙여지는 장면"이자 "이미 무너진 구조 위에 또 다른 층이 쌓이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인간의 시선이 가장 소홀히 지나치는 그 낮은 지점에 작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물리적으로 새겨놓은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앰비언트 메시지(ambient message)'다. 직접 말하지 않고, 공간 전체로 말하게 만드는 방식. 그것이 《타르타르》의 첫 문장이었다.
"세계는 더 이상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전시서문의 첫 선언은 단호하다. "이번 전시는 세계가 더 이상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종말을 도래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조건으로 보는 시각.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진보, 성장, 발전이라는 단어들을 자명한 가치로 믿어온 세계에 대한, 스물여섯 살 작가의 조용하고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감각은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정서, 철학자 티모시 모턴의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과 맥락을 공유한다. 그러나 원민영은 이론으로 말하지 않는다. 먹고, 먹히고, 붙잡고, 소모되는 장면들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 반복은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지속되는 원초적인 움직임에 가깝다.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 〈Time to Sleep Honey〉
가로로 긴 캔버스 앞에 서면 처음엔 꽃밭처럼 보인다. 회색빛 바탕 위에 핑크, 라벤더, 살구색의 형태들이 번져 있다. 그런데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들이 널부러진 작은 몸들로 보이기 시작한다. 서문이 말하는 "천 마리의 죽은 벌"이다.
벌이 잠을 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화면 위의 형태들은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흩어져 있다. 색들은 윤곽을 가지기를 거부한다. 뭉개지고 번지고, 형태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원민영이 말하는 "말이 되지 않는 문장, 문장이 되지 못 한 단어가 모여 때때로 말이 되고, 또 되지 않는 구조—별자리"가 이 캔버스 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실현된다.
수용미학(Rezeptionsästhetik)의 관점에서 이 그림은 흥미롭다. 그림의 완성이 캔버스 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내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괜히 오래 들여다보는 순간 느껴지는 낯선 감정과 아이러니"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작가의 말이, 이 작품 앞에서 가장 선명하게 체감된다.
서문이 없었다면 추상화로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잡아먹는 사마귀"라는 서문의 한 문장을 읽고 화면 앞에 서면, 영락없이 두 사마귀가 입을 마주대고 있다. 제목은 〈Kiss Kiss〉다.
분홍과 갈색 사이의 색조 위로 거대하고 유기적인 형태들이 맞닿아 있다. 창백하고 매끈한 덩어리와, 붉고 습한 무언가. 나선형으로 말린 형태들, 구슬처럼 부풀어 오른 돌기들. 생물학은 공생(symbiosis)과 기생(parasitism)을 구분하지만 원민영의 화면에서 그 경계는 무너진다. "돌봄과 폭력, 유희와 불쾌함 같은 감각들이 교차"하는 것이다. 잔혹한 장면이 동시에 이상하게 다정하게 보인다는 서문의 진단이 이 그림 앞에서 가장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이 전시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시선을 붙드는 작품이다.
〈Kiss Kiss〉
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감각을 작가는 스스로 명명했다. "거역하기 어려운 힘 앞 기이한 명랑성." 서문은 이것이 《타르타르》의 기저를 이루는 감각이라고 밝힌다. 웃음과 불편함, 잔혹함과 다정함 사이를 오가며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 분노가 기본값처럼 퍼져 있음에도 특정한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묘하게 가벼운 리듬을 띠는 것.
이 감각의 계보는 길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농담을 주고받는 두 인물.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인간'이 그럼에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순간. 원민영은 그 계보 위에 있되, 선언하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조용하고 더 깊다. Z세대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정확한 미술적 번역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프레임 안, 소녀처럼 보이는 인물의 두상 위로 짐승 같은 무언가가 올라앉아 있다. 제목이 〈Wolf Girl〉이니 늑대일 것 같지만, 화면 안에서 그것은 늑대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형태다. 두 눈이 희게 뒤집혀 있고, 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인물의 이마에 얹혀 있다. 지배인지 보호인지, 위협인지 기댐인지 알 수 없는 자세.
인물의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알 수 없는 것을 머리 위에 올린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버티는 표정. 입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붉은 선 하나가 흘러내리고 있다. 실인지 피인지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흐릿한 색조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또렷하다. 원민영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보게 만든다.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읽고 싶어하는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Wolf Girl〉
소형 캔버스. 크림빛 어린 동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새끼 염소처럼 보이는 얼굴, 입 주변으로 실이나 덩굴 같은 것들이 흘러내리고 그 안에 이빨처럼 생긴 형태가 걸려 있다. 서문이 말하는 "이빨 빼는 염소"의 장면이다.
그러나 잔혹하지 않다. 오히려 이상하게 무해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작가가 체리 이미지에 대해 말한 것이 겹쳐진다. "예쁘고 가벼운 외형 뒤에 꾸며진 감정, 혹은 일부러 만들어낸 태도." 불편함이 귀여움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것. 제목 〈Good Boy〉가 아이러니하게 읽히는 것은 그래서다. 원민영의 세계에서 착한 아이와 위험한 것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Good Boy〉
전시 제목 '타르타르'에 대해 서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날 것의 상태를 연상시키는 음식의 이름이자,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기보다 단어의 리듬과 소리에서 출발한 명명." 익히지 않은 것. 완성되지 않은 것. 그러나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
원민영이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을 작업 안에 남겨둔다"고 할 때, 이것은 미완성의 고백이 아니다.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수학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말하듯, 어떤 체계도 자기 자신의 완전성을 자기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 원민영의 회화는 그 열린 틈을 봉합하는 대신, 틈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만든다.
미술인문학의 시각에서 원민영의 작업이 주목되는 것은 단일한 미술사적 계보에 안착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화면의 흐린 색감과 유기적 형태는 초현실주의의 문법을 빌리지만, 세계관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생태감각에 닿아 있다. 설치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은 장르를 해체하되, 각 매체의 물성을 오히려 더 예민하게 살린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로서 이 작업에서 읽히는 것은 '모호성의 전략적 활용'이다. 명확한 메시지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해석 공간을 열어두는 방식. 과잉 설명이 넘치는 시대에 설명하지 않는 이미지가 가장 긴 여운을 남긴다는 역설이, 원민영의 화면 위에서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원민영은 2000년생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사회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 앞에서 나는 내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어떤 감각을 발견했다. 그것이 좋은 미술이 하는 일이다.
상히흫 갤러리 전시장 전경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장면들, 《타르타르》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 장면들이 쌓여 이루어진 세계이다." 전시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원민영은 그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반복을 그린다. 오래 공들여, 충분히 정성스럽게, 그러나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도록.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아직 날 것이어도 먹을 수 있다는 것. 어긋나 있어도 그 안에 진심이 스며들 수 있다는 것.
원민영은 20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학부와 석사를 마쳤다. 스물넷에 졸업하고 스물여섯에 대학원을 마친 이 작가는 더소소, YK Presents, 우석갤러리, 상히읗 등에서 꾸준히 그룹전을 이어왔다. 《타르타르》는 그 첫 번째 개인전이다. 그림은 면천이나 린넨 위에 흐린 색감으로 채워진다. 서두르지 않는다. 완성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열린 채로 남겨둔다. 첫 개인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 전시는 완결을 거부하는 세계관을 완결되게 보여준다. 그것이 원민영이라는 작가를 앞으로도 계속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다.
원민영 개인전 《타르타르》는 2026년 6월 13일까지 서울 상히읗(@sangheeut)에서 계속된다.
@iartno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