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반복 사이, 고요한 춤 - 박길주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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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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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주 개인전 《작고 연약한 것들의 춤》 2026.5.6.~5.31 스페이스 문정 (이태원)
이상민   승인 2026.05.18 11:53  |  최종 수정 2026.05.19 14:45

박길주 작가 (전시장과 프로필 이미지 합성 편집)




작년 여름, 우연히 접한 박길주 작가의 전시에 매료되어 '취향의 기록'에 이렇게 썼다. "박길주의 작업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선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작가는 눈에 비친 풍경이 아니라 자연에서 느낀 온기를 화폭에 담는다." 그 글을 쓴 뒤 여기저기 작가를 소개했다. 그로부터 9개월, 서울 개인전 소식이 들려왔다.



인사아트센터 지하 제주갤러리가 아닌, 이태원 골목 안 스페이스 문정. 2026년 5월 6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 《작고 연약한 것들의 춤》은 규모는 작지만 기획 초대한 대표의 정성스러움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드로잉 노트가 공개됐다. 사생(寫生)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시였다.




드로잉 노트, 반복과 차이의 기록

전시장 안쪽 테이블 위에는 박길주의 드로잉 노트 여러 권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제주의 풀섶, 습지, 새, 겨울 숲. 수채와 수묵이 교차하며 쌓인 페이지들. 노트 한 구석에는 작가의 손글씨 메모가 적혀 있었다.

"반복과 반복 사이의 차이는 위대하다. 이 작은 미세한 차이가 결국 변화를 만들어낸다. '고요한 변화'라고 칭할 수 있겠다. 매일 하는 이 드로잉들이 반복적이지만 반복과 반복 속의 작은 변화로 일상의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박길주는 매일 새를 그리고, 매일 풀숲을 그린다. 그러나 반복과 반복 사이의 그 미세한 차이야말로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증언한다. 드로잉은 완성된 회화가 아니라 세계를 지각하는 연습의 흔적이다. 박길주에게 드로잉 노트는 일기이자 악보이자, 춤의 발자국인 셈이다.

벽에 핀(pin)으로 고정된 소묘 드로잉들도 인상적이다. 내려앉은 새, 날아오르는 새. 연필선은 희박하고 형상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전시 서문의 표현처럼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 바깥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머물고,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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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노트 전시 장면




작은 공간이 만들어낸 몰입의 감각

이번 전시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공간 연출이 탁월했다. 숲속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낮게 깔려 전시장 전체를 감쌌다. 이 선택 하나가 관람의 질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소리는 관람객의 신체를 이완시키고, 그림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만든다.

스페이스 문정은 작은 지하 공간이었지만 묘하게 제주스러웠다. 대형 설원 풍경화가 흰 벽에 고요히 걸려 있었고, 선반 위의 올빼미 조각과 물총새 그림이 어우러졌다. 초록색 팸플릿에는 4계절의 감각이 활자로 녹아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주에 와서야 비로소 풀의 냄새, 흙의 온도, 바람의 결을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 제주의 감각을 서울 이태원 골목까지 통째로 옮겨온 시도였다. 그림이 아니라 감각의 이식(移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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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노트




서문이 또 하나의 작품이 된 이유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작가 스스로 쓴 전시 서문이다. 《작고 연약한 것들의 춤》이라는 제목 아래 5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글은, 풀의 덩어리에 대한 명상(part 1), 귤 박사를 만난 에피소드(part 2), 자연과 인위의 경계에 선 풍경(part 3), 눈(雪)의 두 겹 얼굴(part 4), 우리 모두의 춤(part 5)으로 이어진다.

그중 part 4의 울림이 깊다. "눈은 나에게 두 겹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을 품은 채 가볍게 반짝이는 표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래에서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시간의 무게다. 눈이 내리면 이제 조금 더 오래, 그 아래를 생각하게 된다." 동일한 대상에서 두 겹의 시간을 동시에 감지하는 감수성, 바로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지각의 분기(分岐)다. 작가가 서문을 직접 쓴다는 것은, 그가 그림뿐 아니라 언어로도 깊이 사유하는 작가임을 입증한다.

서문의 마무리 말도 압권이다. "우리는 여전히 크고 분명한 것들에 익숙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 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미세한 흔들림이 각자의 감각 속에서 또 다른 '춤'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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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직접 제작한 전시서문 팸플릿




불가능한 것을 채우는 바탕은 '관계'

작년 전시 감상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크리스천인 박길주 작가는 신앙과 예술을 조화롭게 결합시킨다. 우리가 보는 진짜 새는 마음속에 있다. 새를 찾는 과정은 마음속의 예수님을 찾는 과정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가시적 자연을 통해 비가시적 영성에 도달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전시 제목은 달라졌다. 《불가능한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한 당신의 바탕》에서 《작고 연약한 것들의 춤》으로. 거대한 질문이 작은 몸짓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질문의 본질은 같다. 무엇이 나를 채우는가. 내 삶의 바탕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번 전시를 이렇게 고백했다. "그 마음들이 하나하나 모여 이번 전시가 더욱 따뜻하고 풍성해진 것 같다. 나는 그저 숟가락 하나 살짝 얹은 듯 다른 이들의 귀한 작업과 응원에 기대어 내 작업을 완성한 셈이다." 불가능한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한 그의 바탕은 결국 '관계'였다.

드로잉 노트에는 또 이런 소망이 적혀 있었다. "평범함이 위대한 것이 되길… 나에게 주어진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후각적 온 감각들이 더욱 예민하게 살아 숨쉬어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잡아내고, 이것들을 공유할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

거창하지 않다. 크지 않다. 그러나 작고 연약한 것들이야말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 바깥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머물고, 관계를 맺는다.

드로잉 노트 몇 권, 새 조각 몇 개, 설경 몇 점. 이 작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태원 골목 안의 전시는,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나에게 작고 연약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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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박길주(b.1982) 작가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안양에서 자란 후, 2006년 제주로 이주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제주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미술학과(서양화 전공)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도시에서 자란 이가 제주 자연과 만나며 겪은 깊은 변화를 작품 세계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왔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서울 이태원 스페이스 문정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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