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기록] 윤세열 작가 @yunseyeul
아트인코리아
승인 2026.08.12 10:06
[취향의 기록] 윤세열 작가
@yunseyeul
윤세열 개인전
<도시유희 都市遊戲>
2026. 8. 3(월) – 9. 3(목)
갤러리로윤 3층 @gallery_royoon
<전시감상 요약문>
전시감상 - 윤세열(b.1976)
먹빛 서울, 유희가 되다
이 상 민 | 미술인문 작가,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장
갤러리로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색이 눈을 붙잡는다. 오리나무 열매로 삭힌 비단의 누런 바탕은 방금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오래된 지도처럼 보인다. 그 위에 얹힌 것은 지극히 동시대적인 서울의 스카이라인이다. 고문서의 피부에 오늘의 뉴스를 적어 넣은 듯한 시간의 어긋남, 빽빽한 건물들 속에서도 소음이 들리지 않는 침묵의 역설이 «도시유희»의 첫인상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능선 아래로 도시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화면 하단의 강은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강에 슬쩍 앉은 오리 한 마리, 고층 빌딩 사이에서 번지점프하듯 매달린 사람, 느닷없이 떠 있는 뗏목, 화면 한켠에 삐죽 새겨진 '도라지'라는 글자. 읽히지 않는 문자의 흔적도 곳곳에 숨어 있다.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술래가 되어 화면 속을 헤맨다. «도시유희»라는 제목은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우리의 눈동자에 먼저 걸리는 술어였던 셈이다.
재료 선택도 예사롭지 않다. 본래 화조화와 궁중 회화에 쓰이던 격조 높은 비단 위에 콘크리트 아파트 숲을 얹는 행위는 일종의 전복이다. 고귀한 바탕이 세속의 풍경을 떠받치는 순간, 도시는 완상의 대상으로 격상되고 비단은 재개발의 서사 속으로 끌려 내려온다. 오리나무 물을 앞뒤로 예닐곱 차례 발라야 올라오는 저 고아(古雅)한 빛은, 재건축 공고 한 장에 하룻밤 만에 스카이라인이 바뀌는 도시의 속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실제로 한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은 언제 그린 것이냐"는 문의를 받았다고 하니, 가장 느린 매체로 가장 빠른 도시를 붙잡아두려던 작가의 의도는 이미 절반쯤 성공한 셈이다.
몇 달 전 이목화랑에서 열린 «기발한 경계»와의 궤적도 짚어야 한다. 촛불과 도마뱀, 추파춥스 같은 소품을 그렸던 이 전시는 산수의 이탈이 아니라 산수 개념 자체를 넓혀보는 실험이었다. 촛불을 불기 전과 불고 난 후, 그 사소한 행위 하나로 화면의 상황 전체가 뒤바뀐다 - 우리가 산수라 믿어온 고정관념이 순식간에 깨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던져서 노는 주사위 역시 우연과 놀이의 상징이었다. «기발한 경계»는 «도시유희»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이다. 유희의 씨앗은 이미 그때 심어져 있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일찍이 이 화면을 "산수화적인 분위기", 강을 사이에 둔 도시의 배치를 "격수隔水와도 같은 맥락"이라 짚었다. 문인이 강 저편의 세속을 거리 두고 관조하던 전통적 독법이지만, 솔직히 이 격수의 미학은 이제 조금 낡았다.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했듯 규칙과 경계 안에서 자유가 허락되는 것이 놀이라면, 윤세열의 도시는 더 이상 강 건너에서 조용히 완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걸어 들어가 문자를 찾아야 하는 놀이판이다. 관조에서 참여로, 거리 두기에서 뛰어들기로 - «도시유희»가 «격수»의 미학 위에 새로 써넣은 존재론이다.
도시를 소요하며 채집하듯 그려낸다는 점에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떠오른다. 경성을 하루 종일 걸으며 무심한 듯 예민하게 풍경을 채집하던 구보처럼, 윤세열의 붓끝도 서울을 세필로 더듬는다. 다만 구보의 문장이 활자로 남았다면, 윤세열의 산책은 대부분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남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시장을 나서며 문득, 이 그림들이 문장 속 쉼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안다고 믿었던 도시라는 문장 한복판에 오리나무 빛깔의 쉼표 하나를 슬쩍 찍어 넣은 것이다. «도시유희» 앞에서는 근엄해지지 말 것. 숨은 오리와 글자를 찾아보고, 강의 텅 빈 여백에 저마다의 불안과 안도를 번갈아 얹어보길 권한다. 먹빛으로 가라앉은 서울이 결국 우리를 초대해 함께 노는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윤세열은 추계예술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비단에 먹과 오리나무 염색을 겹쳐 '도시산수화'라는 독자적 회화 세계를 구축해 왔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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