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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승의 ONE PIECE는 전시 전체가 아닌 작품 하나에만 집중해, 다양한 분야와 연결 짓는 통섭적 감상문 연재입니다. '많이'보다 '깊이' 보자는 다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https://artinkorea.kr/one





[손만승의 ONE PIECE] 몽환경, 지나간 것이 다시 숨 쉬는 자리 — 유가월 작가의 〈담(淡)의 숨〉 작품 감상문    네이버 구글

단양 여행의 기억이 물과 안료의 우연한 흐름을 거쳐 몽환경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따라갑니다. 무상함을 상실이 아닌 지속의 조건으로 읽어낼 때, 화면 속 그림자도 스스로 숨 쉬는 또 하나의 산이 됩니다.
아트커넥터   승인 2026.07.19 19:15  |  최종 수정 2026.07.20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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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골목에서

갤러리 그라프는 청담동 골목 안에 자리한, 나에게는 몇 번 발걸음 했던 낯익은 공간이다. 2년 전 근처 스타트업에서 CFO로 일할 때 사무실에서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점심시간에 종종 들르곤 했다.

그래서 갤러리 그라프에서 열리는 《여과된 풍경》에서 유가월 작가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이 먼저 왔다. 이 전시는 유가월과 마리노 후나하시, 두 작가가 나란히 풍경을 다시 쓰는 2인전이다.

후나하시가 마티에르와 붓질로 감각의 흔적을 두텁게 쌓아 올린다면, 유가월은 그 반대편에서 스며들고 번지는 방식으로 풍경에 접근한다. 전시장 안쪽에서 눈에 띈 건 〈담()의 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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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숨(일부), 120×80cm, 장지에 채색, 2026       

작가는 '()'을 고요함과 절제, 여백 속에 깃든 생명력으로, ''을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자연과 만물 사이를 흐르는 생명의 기운으로 풀이한다.

화면 위쪽에는 분홍과 회청색이 뒤엉킨 채 안개처럼 부풀어 오른 산세가, 아래쪽에는 초록과 청록이 섞인 바위섬 같은 형상이 수면 위에 떠 있다. 그리고 그 형상은 화면 하단에서 물에 비친 듯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산과 그 물그림자가 마주 보고 있다. 위아래로 겹친 청록색 두 산은 같은 형상에서 비롯됐지만, 번짐과 색의 결은 서로 다르게 풀려 있다. 제목처럼, 이 산은 숨을 쉬듯 한 번 부풀어 오르고 한 번 가라앉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한국의 아름다움인가

〈담()의 숨〉은 단양에서 경험한 자연에서 출발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어지는 산줄기와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 느리고 고요한 자연의 리듬 속에서 그는 산천 사이를 흐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운()을 느꼈다.

이 경험은 작업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자연미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그는 산의 형태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산과 물의 기운, 자연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이어지는 생명의 리듬을 표현하고자 했다.

나 역시 얼마 전 가족과 단양을 다녀왔다. 유람선을 타고 도담삼봉을 지나며 물 위로 솟은 봉우리를 올려다봤다.

그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은 봉우리의 정확한 모양보다는 물살과 산그림자, 배 위에서 흔들리던 시간의 감각이었다. 〈담()의 숨〉 앞에 서서야 나는 그때 내가 눈으로만 보고 미처 붙잡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이 화면에는 정자도, 유람선도, 그 위를 오가던 사람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 모든 장면을 감싸고 있던 기운, 산과 물 사이를 흐르는 리듬 그 자체다.

경계에 놓인 산수

이 흐릿함은 우연이 아니다. 유가월 작가는 자신의 학위논문 「몽환경(夢幻景)으로서의 산수 표현연구」에서 산수를 완결된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 각성과 꿈의 경계에 놓인 중간 상태로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산수의 기능은 잠시 머물고, 되돌아보고,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생성되는 기운이라면, 이 산 역시 지도 위 어떤 한 지점에 고정될 수 없다.

이 산은 도담삼봉도, 내가 탔던 유람선의 항로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을 지나온 사람이 잠깐 몸을 누이고 갈 수 있는 정거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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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숨, 장지에 채색, 120×80cm, 2026       

     

숨을 참지 않는 붓

화면의 바탕은 수성 마블링으로 만들어졌다. 물 위에 안료를 띄우고 그것이 확산하고 충돌하고 회전하는 과정을 거쳐 종이에 옮기는 방식인데, 수면의 미세한 떨림이나 온도, 습도, 종이 섬유의 흡수성 같은 조건에 따라 매번 다른 무늬가 나온다.

결정적인 것은 이 과정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안료가 물과 함께 한 번 움직이고 나면 그 흔적은 그대로 고정된다. 유가월 작가는 이 비가역성을 자신의 산수가 다루는 무상성(無常性)의 물질적 증거로 삼는다.

무상성이란 세상 어떤 것도 고정된 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개념이다. 화면 위의 얼룩 하나하나가, 다시는 똑같이 재현할 수 없는 순간의 흔적인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동적 바탕 위에, 그는 유사묘와 행운유수묘 같은 전통 필법으로 가늘고 끊김 없는 선을 얹어 산의 능선을 완성한다.

마블링이 남긴 우연한 흔적을 애써 지우거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살려내는 태도인데, 이는 인위적으로 다스리기보다 흐름에 맡기는 무위자연의 화법과 맞닿아 있다. 숨을 참거나 조절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발견되지 않는 이상향

산수를 향한 오래된 통념 하나는, 이상향이란 어딘가에 미리 존재하고 있어 우연히 발견되는 장소라는 믿음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마주친 무릉도원이 그렇다.

복사꽃 핀 마을은 그가 찾아 나서기 전부터 이미 거기 있었고, 그는 다만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유가월 작가의 산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물과 안료가 부딪히기 전까지 그 산은 없었다.

단양의 풍경은 출발점이었을 뿐, 화면에 도착한 것은 단양의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한 작가의 호흡이다.

호접지몽, 그림자의 산도 산이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것은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꿈에서 나비가 된 장주는 깨어난 뒤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자신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진짜인가가 아니라, 나비로 사는 동안 그 삶이 온전히 나비의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담()의 숨〉의 물그림자도 비슷하게 움직인다. 유가월 작가는 같은 반영 구도를 쓴 이전 작품 〈그림자 속 공간(影中之境)(2022)을 설명하면서, 화면 하단의 반영이 위쪽 풍경을 단순히 되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된 두 번째 공간으로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림자는 원본의 그림자로만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을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담()의 숨〉 아래쪽 산도 위쪽 산의 부속물이 아니라, 물속에서 따로 숨 쉬는 또 하나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강은 흐르고, 나도 흐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대개 상실의 언어로 읽힌다.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런데 유가월 작가의 마블링을 보고 나면 이 명제가 다르게 읽힌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매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학위논문 결론부는 자신의 연구를 최종적 정의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다시 쓰이게 될 열린 틀이라 부른다. 무상함을 상실이 아니라 지속의 조건으로 바꿔 읽는 태도다.

골목을 나서며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이 골목을 다시 걸었다. 도담삼봉을 오가던 유람선 위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봉우리를 사진에 담으려 했지만, 정작 남은 것은 물살에 흔들리며 바라보던 시간의 감각이었다. 유가월 작가가 말하는 몽환경은 정확히 이 자리에 있다. 도착해서 붙잡는 풍경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남는 감각.

〈담()의 숨〉의 산도 마찬가지다. 물 위에 한 번 흐른 안료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되돌릴 수 없음이야말로 다음 무늬를 가능하게 한다. 내 단양의 기억도 그렇게 한 번 흘러갔기에, 지금 이 그림 앞에서 다시 한 번 살아났다.

지나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다시 숨 쉬고 있었다.

 

: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 손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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