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만승의 ONE PIECE M] 가장 고요한 순간,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에드워드 호퍼의 「큰 파도」와 네빌 체임벌린의 '평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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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승의 ONE PIECE는 전시 전체가 아닌 작품 하나에만 집중해, 다양한 분야와 연결 짓는 통섭적 감상문 연재입니다. '많이'보다 '깊이' 보자는 다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https://artinkorea.kr/one





[손만승의 ONE PIECE M] 가장 고요한 순간,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에드워드 호퍼의 「큰 파도」와 네빌 체임벌린의 '평화 선언'    네이버 구글

하늘은 맑았고,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세상은 전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트커넥터   승인 2026.07.1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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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더없이 잔잔합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깃털처럼 가볍게 떠 있습니다. 흰 돛을 단 작은 배 한 척이 부드러운 너울을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갑니다. 누가 봐도 평화로운 여름날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그림 앞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1939년에 그린 「큰 파도(Ground Swell)」 이야기입니다.

화면 가득 옥빛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캣보트 한 척이 살짝 몸을 기울인 채 파도를 타고 있습니다. 배에는 조타수를 포함해 네 사람이 타고 있는데,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모두의 시선이 한곳, 왼쪽에 떠 있는 종 달린 부표를 향해 있습니다. 함께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이 침묵은, 호퍼가 도시의 카페나 사무실, 침실 같은 실내 공간에서 즐겨 그리던 '고독'이라는 주제가 망망대해 위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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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파도, 91.9 x 127.1cm, oil on canvas, 1939 (출처: 구글아트앤컬처)

      

호퍼는 원래 항구도시 뉴욕 냐크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조선소가 늘어선 강변 풍경을 보고 자라며 평생 바다를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1934년 아내 조세핀과 매사추세츠 케이프코드의 트루로에 정착한 뒤로는 여름마다 바다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큰 파도」에서도 그의 애정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돛의 밧줄, 즉 삭구를 표현한 방식입니다. 물감이 아니라 연필로 화면 위에 직접 선을 그어 넣었는데, 유화 위에 이런 마무리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제목의 '그라운드 스웰(ground swell)'은 항해 용어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폭풍이나 요동이 만들어낸 파동이 시간을 두고 잔잔한 바다까지 밀려오는 현상을 뜻합니다. 즉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바다가 고요하다고 해서, 위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저 멀리서 시작된 무언가가,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퍼는 이 그림을 1939 8월부터 그리기 시작해 9 15일에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 유럽에서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조금 되돌려 보겠습니다. 1938 9 30,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협정을 맺고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협정의 내용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영토인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겨주는 대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은 다우닝가 10번지 앞에 모인 시민들에게 종이 한 장을 흔들어 보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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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빌 체임벌린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돌아온 후 헤스턴 비행장에서 히틀러와 자신이 서명한 평화적 방법을 약속하는 영국-독일 선언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위키백과)


시민들은 환호했습니다. 오랜 불안 끝에 찾아온 평화 선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6개월 뒤 히틀러는 약속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병합했고, 이듬해인 1939 9 1일에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체임벌린이 "평화"를 선언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호퍼가 「큰 파도」의 마지막 붓질을 마친 9 15일은, 바로 그 폴란드 침공 소식이 전 세계 신문 1면을 채우고 있던 때였습니다. 화가가 이 시기의 뉴스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자기 그림에 대해 설명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캔버스 속 인물들이 말없이 부표를 바라보는 그 시선과, 평화를 선언했던 시민들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 소식을 듣게 되는 그 역사의 흐름이, 묘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겉보기엔 잔잔해도, 어딘가에서는 이미 큰 파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라운드 스웰'이라는 현상 자체를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해양학적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이는 파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앞의 바람이 그 자리에서 즉시 만들어내는 파도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먼 곳, 때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폭풍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시간을 두고 이동해 도착하는 파도입니다. 후자가 바로 '너울', 즉 그라운드 스웰입니다.

이 파도는 발생지의 폭풍이 이미 잦아든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 이동하며, 정작 그 파도를 맞이하는 바다는 하늘이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일 수도 있습니다. 뱃사람들이 맑은 날에도 너울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하늘과, 지금 내 발밑에서 일렁이는 파도가 반드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퍼가 제목에 이 단어를 골라 붙인 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 시점의 역사와 겹쳐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정확한 제목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체임벌린을 무작정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화를 갈망했던 마음,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절박함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눈앞의 고요함을 진짜 평화로 착각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저 멀리서 이미 시작된 움직임을 미리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큰 파도」 속 인물들은 적어도 그 점에서는 체임벌린보다 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맑은 하늘을 즐기는 대신, 부표를 응시합니다. 눈앞의 평온함에 안심하지 않고, 다가올지 모르는 변화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저마다의 '그라운드 스웰'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만, 실은 멀리서 이미 시작되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무언가 말입니다. 호퍼의 그림이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바로 그 조용한 경고 때문이 아닐까요.

: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 손만승
https://www.instagram.com/art.connec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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