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미진 아티스트 토크 ; 라흰갤러리> - 색·구조·지각으로 읽는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
<천미진 아티스트 토크 ; 라흰갤러리> 행사 진행 전경 (사진: 라흰갤러리)
회화에서 건축으로, 다시 회화로
대화는 작가의 이력에서 출발했다. 천미진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2003년 졸업과 동시에 독일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했다. 회화를 그만두고 건축으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회화가 품고 있던 공간감에 대한 의문을 다른 분야에서 풀어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얇은 레이어를 쌓아 평면 위에 공간감을 구현하려던 회화적 시도가, 실제 공간을 다루는 건축 공부로 이어진 셈이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논리와 관계성을 배우는 시기였다고 작가는 돌아봤다. 건축은 혼자 완결할 수 없는 작업이고, 클라이언트·예산·재료 같은 복합적인 변수를 동시에 풀어내야 하는 분야였다. 반면 이후 10여 년을 보낸 이탈리아에서의 삶은 전혀 다른 감각을 열어주었다. 언덕 위 집에서 매일 달라지는 하늘과 빛, 그리고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색채의 조합을 지켜보면서 색에 대한 감도가 예민해졌다고 한다. 이 시기 작가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르네상스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였다. 성당에서 마주한 금빛과 청색이 정면에서 볼 때와 움직이며 볼 때 전혀 다른 색으로 다가오는 경험이,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진주빛(펄) 색채와 표면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었다.
구조: 형태가 아니라 조건
조은영 큐레이터는 건축이 기능·하중·공간의 복합적 질서를 다루는 영역이라는 점을 짚으며, 작가에게 구조가 계산의 대상인지 감각을 발생시키는 조건인지 물었다. 천미진은 회화에도 나름의 구조가 있다고 답했다. 레이어를 쌓고 그 안에 축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구조라는 것이다. 건축에서 배운 구조 개념은 이제 그에게 형태나 형식이 아니라 '조건'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토크 후반 이상민 이사장이 인용한 큐레이터의 표현—"천미진의 구조란 형식이나 형태가 아니라 조건이다"—과도 맞닿는 지점이었다.
접힘, 종이 한 장에서 시작된 개념
전시 제목이기도 한 '접힘'은 물리적으로 종이가 접히는 데서 출발한 개념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평면인 종이가 한 번 접히면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같은 면에서도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드로잉 작업 중에 발견했고, 이 경험이 색이 지닌 깊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로 발전했다. 즉 접힘은 완성된 형태라기보다 색과 구조가 서로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지지대에 가깝다는 설명이었다.
회화·조형·설치, 하나의 흐름
이번 전시는 회화, 조형물, 설치가 함께 놓여 있다. 천미진은 이 매체들이 각각 독립된 결과물이라기보다, 회화에서 출발한 하나의 감각이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어 전개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중앙의 구조물은 완결품이라기보다 회화와 설치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이 연작에는 '모포라마(Morforama)'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모프(변형)와 파노라마(펼쳐짐)를 합성한 이름으로, 2024년 밀라노에서 처음 구조물로 구현한 이래 장소의 조건에 맞춰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프로젝트다. 작가는 회화가 언제나 자신의 중심이라고 강조하면서도, 평면이어야 한다는 편견만은 내려놓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라흰갤러리 특유의 복층 구조와 계단, 위아래로 오가는 시선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공들여 고려한 조건이었다. 도면을 받은 뒤 렌더링으로 관람 동선과 시점을 미리 계산했고, 천이 늘어지는 정도까지 시뮬레이션해 설치했다고 한다. 설치 기간이 짧았던 만큼 사전 준비가 관건이었다는 후일담도 이어졌다.
관객의 움직임과 지각
토크는 결국 관객이 이 모든 요소를 어떻게 지각하는가로 수렴했다. 천미진은 관객이 단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공간에 들어와 작품과 관계 맺는 존재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금은 건물 안에 놓여 있지만, 앞으로는 자신이 거주하는 이탈리아의 바다나 산 같은 자연 속에 설치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경우 작품은 고정된 조형물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변화하거나 소멸할 수도 있는, 확장 가능성을 지닌 작업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큐레이터가 전시 서문에 쓴 "시간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대화가 이어졌다. 천미진은 물을 많이 사용해 겹겹이 색을 올리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며,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달에 걸쳐 쌓인 시간 자체가 화면에 담긴다고 말했다. 정면에서 보이는 결과물은 하나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멈춤과 굳음, 그 위에 다시 얹는 색이 반복된 축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질의응답>
○이상민 : 자신이 인문계와 자연계를 오가고, 수학을 전공한 뒤 언론학과 사업으로 이어진 이력을 언급하며, 이런 궤적이 오히려 감상자로서의 시야를 풍요롭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통섭적 감상'—서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며 조합해 보는 사고방식—이 작가의 회화·건축 이력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짚었다. 조은영 큐레이터의 "천미진의 구조는 형식이나 형태가 아니라 조건이다"라는 표현을 인용하며 이 '열린 조건'이 앞으로 조명, 미디어 등으로 확장될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이상희 : 건축이 기능(펑션)을 전제로 하는 분야인 데 반해 작가의 언어는 매우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며, 건축 실무에서 10년을 보낸 경험이 이후의 회화적 사고와 상충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안도 다다오의 물의 교회, 제주 방주교회 등을 예로 들어 기능과 미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의 사례를 짚었고, 작가가 SNS에 올린 사진에서도 특정한 구도와 공간감이 뚜렷이 느껴진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석영 : 다른 일정 중 우연히 초대받아 사전 정보 없이 참석했다고 밝히며, 설치 작업을 두고 작가가 "이 작품도 하나의 프레임일 수 있고, 작가도 프레임일 수 있고, 관객도 프레임일 수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 인터랙티브하고 경계를 허무는 작업 방향을 읽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언어로 규정하는 일의 어려움—작품은 늘 변화하는 중이며 100%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공감을 표하며, 색채 감각을 미적 완결로 규정하기보다 계속 확장시켜 나가려는 태도가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마무리
90분 가까이 이어진 이날 토크는 회화에서 출발해 건축을 거쳐 다시 회화로 돌아오는 천미진의 궤적, 그리고 그 안에서 '접힘'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색·구조·지각의 층위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참석자들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다음 계획—이탈리아의 자연 속으로 나아가는 설치, 조명과 미디어로의 확장—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며 마무리됐다.
정리 / 글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주)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iartnoori





